9. 회사를 떠나서

98. 케이블 껍데기 쓰다듬기 검사

Thomas Lee 2024. 1. 13. 07:06

<케이블 껍데기 쓰다듬기 검사>

 

28년 전, 1995년, 영광 3,4호기 건설이 진행되고 내가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하던 때에는 뉴욕사무소에 사무직 소장 1명, 기술직 부장 1명, 기술직 과장 7~8명, 한기의 기술부장 2명이 나와 있었고, 사무직으로는 계약관리와 대금지불, 선적업무, 그리고 경영정보 수집을 위하여 사무직 부장 1명, 사무직 과장 7~8명이 나와 있었다. 사실 좀 많은 인원이 나와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2014년 내가 용역 형태로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 원전에 공급되는 미국 기자재 제작독려업무를 수행하게 되었을 때는 미국 뉴저지 포트리의 뉴욕지사가 대폭 축소되어 조그만 사무실에 사무직 부장(지사장) 1명에 사무직 과장 2명, 현지채용직원 1명, 도합 네댓 명이 전부였고 수행하는 업무는 뉴욕증시의 투자자 관리업무가 주였다. 기술직 직원은 없었고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 원전 건설에는 아예 간여하지 않았다. 뉴욕지사는 사무직 사업소가 되어 있었다.

 

서울의 한전본사 UAE사업처에서는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원전에 공급되는 기자재 제작관리 독려를 위하여 기술직 과장 1명을 피츠버그의 웨스팅하우스 공장에 파견, 상주시키면서 웨스팅하우스와 아울러 미국 전역에 흩어진 20여 기자재 제작업체들에 대한 독려와 관리도 수행하게 하였는데 과장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업무를 수행하게 한 것은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별도로 코센(KOCEN) 직원 두 사람이 한 사람은 피츠버그에, 한 사람은 뉴햄프셔 뉴잉턴에 배치되어 품질검사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 역시 과중한 업무였고 그래서 많은 경우 구매자 품질검사를 생략하고 업체자체수행 품질검사만으로 선적토록 하였다. 아무리 옛날에 비하여 한국 제작물량이 늘어나고 미국 제작물량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이런 허술하고 부족한 조직과 인원으로 미국 기자재 제작을 관리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한전은 뒤늦게 미국 제작분 기자재의 납품지연과 이로 인한 건설공정의 영향을 깨달았고 그렇게 2014년 6월부터 내가 미국에서 기자재제작 독려업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피츠버그에 나와 있던 한전 차장(과장)은 나에게 미국 동북부 지역의 제작업체들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커넥티컷 주의 RSCC 케이블 제작지연이 가장 심각하다고 했다. 나더러 아예 RSCC에 상주하면서 케이블 제작독려를 하라고까지 했다. 그 다음으로 뉴저지주의 Unique사 복수기 진공펌프 제작이 심각하게 지연되고 있다고 했다. 그 뿐 아니었다. 차츰 알게 되었지만 롱아일랜드의 Target Rock사에서 제작되는 수 백 개의 급속작동 밸브들, 그리고 뉴저지주의 Mistras의 밸브누설감지설비들도 한기의 설계도면 검토지연으로 제작착수조차 되지 않고 있었고, 매사추세츠주의 Pentair사는 원자로 계통 안전밸브의 시제품 제작과 성능시험 인증이 지연되어 제작에 들어가지도 못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그 많은 이야기와 에피소드들을 생략하고 케이블 검사에 얽힌 이야기와 복수기 진공펌프 제작사의 땡깡부리기 스토리는 좀 남겨두고 싶다.

 

미국의 유명한 케이블 제작전문업체 RSCC는 커넥티컷주 하트포드 북쪽 브래들리 공항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Rockbestos라는 이름의 회사였는데 워렌 버핏의 자본에 인수되어 Marmon Group에 속한 회사로 RSCC가 되었다. 종업원 400~500여명에 드넓은 제작공장과 함께 LOCA사고(원자로냉각수상실로 인한 노심용융사고상황) 조건으로 케이블을 시험할 수 있는 시험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USNRC(미원자력규제기관)의 감사를 받고 있다.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 원전에 원자력안전등급(IEEE Class 1E) 케이블을 공급하는 업체로 선정된 것은 아랍에미레이트 원자력공사(ENEC)가 RSCC를 콕 찝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RSCC가 바라카원전 케이블을 공급하게 되었는데....

 

2013년 5월에 신고리원전 3,4호기 케이블 시험성적 조작사건이 터졌다. 박근혜 정부는 신고리 3,4호기 건설공사를 중단시키고 문제의 케이블을 전량 교체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한수원은 부랴부랴 RSCC에 신고리원전 3,4호기 안전등급 케이블을 발주하였다. 이 바람에 바라카원전 케이블은 제작착수 되지도 못 하고 신고리 3,4호기 3,4호기 케이블부터 먼저 제작하게 되었고 바라카원전은 신고리 3, 4호기 케이블이 먼저 제작완료되기를 기다려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전이 건설하는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원전 건설현장에서는 케이블 공사가 중단되어 공정지연이 심각하게 되었다.

 

한전의 바라카원전 건설은 그 설계가 똑같은 신고리 3,4호기와 계약적으로 연동되어 있어서 신고리 3,4호기가 지연되면 바라카원전도 지체상금을 물도록 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전 바라카원전은 신고리 3,4호기 케이블 제작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수원이 발을 동동 굴려도 워낙 케이블 제작물량이 많고 다양하다 보니 신고리 3,4호기용 케이블 제작공급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거기에다 수많은 품질결함 문제가 대두되었다. 내가 RSCC에 갈 무렵에는 한수원과 RSCC 간 감정이 대단히 악화되어 살벌하였다. 한수원은 RSCC의 제작지연과 품질결함을 비난하였고 RSCC는 한수원의 지나치게 까다로운 품질검사기준과 지체상금 부과를 비난하였다. 한수원은 변호사들을 데리고 RSCC를 방문하여 법률적 조치를 하겠다고 하였고 RSCC는 이를 구매자의 부당한 강압과 협박으로 받아들였다.

 

신고리와 바라카 원전에 들어가는 케이블은 수 백 종류가 넘는다. 컴퓨터 연결선처럼 가느다란 케이블부터 사람 팔뚝만큼 굵은 케이블까지 천차만별로 다양한 사양과 규격을 가진다. 수십 가닥의 케이블이 들어가 팔뚝처럼 굵은 케이블의 경우는 수 천 피트를 감아놓은 커다란 릴의 무게가 4톤, 5톤을 넘기도 한다.

 

한국의 JS케이블의 시험성적조작사건에 놀란 한수원은 RSCC에서 신고리 3,4호기 건설현장에 납품된 케이블들을 철저히 검사하였다. 수많은 검사인원이 달라붙어 릴에 감겨진 케이블들을 모조리 풀어서 손으로 쓰다듬어 만져가며 꼼꼼하게 인수검사를 했다. 피복에 조금이라도 흠이나 불순물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불만족보고서(NCR)이 발행되었고 RSCC에 재공급 하라고 요구하였다.

 

RSCC는 케이블 피복을 이런 식으로 검사하여 리젝트(Reject)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맞섰다. 케이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선을 감싸고 있는 절연피복, 인슐레이션(Insulation)이고 겉의 피복은 고무로 제작되어 케이블을 보호하는 껍데기에 불과한데 껍데기인 고무피복을 과도하게 검사한다는 것이었다. 또 피복은 사소한 흠집이 허용될 수도 있고 고무땜질을 하여 간단히 수리할 수도 있는데 한수원이 무조건 재제작 납품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이로 인한 납품지연의 책임까지 RSCC에 물어 지체상금을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직경이 굵은 케이블들에서 발생한 인슐레이션의 ‘짓눌린 형태’의 파손결함들이었다. 한수원이 신고리 3,4호기 건설현장에 도착한 굵은 케이블들을 검사하느라 릴로부터 풀어서 일일이 만져가면서 검사를 하면서 케이블을 8자 형태로 겹쳐 쌓아 올렸는데 워낙 여러 겹으로 겹쳐 쌓아 올리니 케이블의 자체무게에 짓눌려 아래에 놓인 케이블이 손상된 것이었다. 이를 놓고 한수원은 건설현장에서 케이블을 풀어 8자 형태로 쌓는 것은 통상적인 작업방식인데 8자로 쌓았다고 해서 케이블이 손상된다면 그것은 제작결함이라고 주장하였고 RSCC는 무거운 케이블을 8자 형태로 높이 쌓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무지한 작업방법이며 손상책임은 한수원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신고리 3,4호기 케이블을 놓고 쌓인 한수원과 RSCC의 감정대립과 충돌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2017년에 한수원은 RSCC를 상대로 800만불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 소송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케이블은 구리도선과 인슐레이션, 그리고 피복으로 구성된다. 제작의 핵심은 인슐레이션이다. 구리도선은 특수한 합성수지 인슐레이션으로 입혀지고 고주파 조사 등 여러 과정을 거쳐 curing 처리되고 검사, 시험된다. 이 인슐레이션은 설계상 최악의 조건에서도 구리도선을 보호하며 60년 동안 견뎌야 한다. 그리고 겉에 덮이는 고무재질의 피복은 외부보호용 피복이다. 내가 보기에 한수원이 케이블의 껍데기라 할 수 있는 이 고무피복을 손으로 일일이 만져가며 조그만 흠집까지 잡아내는 품질검사를 한 것은 지나친 게 맞다.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에 납품되는 케이블들은 그런 식으로 검사되지 않았고 따라서 한수원처럼 충돌하고 감정이 악화되지도 않았다.

 

나는 RSCC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제작책임자들을 독려하였고 공장을 돌며 작업원들과 친숙하게 대화하며 문제를 파악하였고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 건설현장과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케이블들이 최대한 원활하게 납품되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 했다. 물론 아랍에미레이트 바라카원전 케이블에서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신고리 3,4호기 때문에 제작납품이 지연되는 바람에 한전은 많은 돈을 들여 수많은 케이블들을 항공운송 해야 했다. 또 RSCC 공장 뒷마당에서 케이블 릴에 묻어 들어간 조그만 돌조각들이 케이블을 손상시키기도 했고, 케이블들의 길이가 맞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고, 케이블 릴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나무의 종류(적송이냐, 백송이냐)를 놓고 분쟁도 있었고, 현장에서 인수검사를 하던 중 케이블 내부손상이 확인되어 소동을 벌인 적도 있다. 그리고 RSCC가 그리 정직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회피하고 한전에 그 비용을 뒤집어씌우려고 시도하기도 하였고 내가 RSCC의 그런 시도를 좌절시킨 적이 여러 번 있다. 2017년말 나의 제작독려요원 계약기간이 끝나서 내가 떠나온 후로 RSCC가 또 그런 짓을 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그 무렵 건설현장에서 발견된 케이블 손상문제를 둘러싸고 원인조사를 하고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