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화력

30. 단칸방 전세살이

Thomas Lee 2022. 5. 25. 03:23

내가 영월화력을 떠나 부산화력으로 간 해가 1970년이었고 그 부산화력에서 운전교대근무를 하면서 학교를 마치고 군대에 다녀오고 결혼을 하고 부산을 떠나 본사 원자력건설부로 간 해가 1979년이었으니 나는 70년대를 온전히, 나의 이십대를 온전히 부산화력에서 보낸 셈이다.

당시엔 아직 송도가 변두리였는데 감천은 송도에서 높은 고개를 넘어서 가는 외곽 시골동네였다. 16번 입석버스와 17번 좌석버스가 감천-괴정-대티고개-서대신동 구덕운동장으로 다녔고, 또 같은 번호의 버스가 반대방향으로 감천-송도-산복도로-충무동-서대신동 구덕운동장으로 순환운행하였다.

버스가 서대신동 구덕운동장에서 대티고개를 넘으면 괴정동 인분종말처리장에서 풍겨나오는 구수한 인분향기(?)가 버스를 온통 휘감고 모든 승객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반대로 송도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감천까지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버스는 충무동을 지나 완월동 뒷산 산복도로를 구불구불 돌면서 시원한 바다와 영도와 송도의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괴정동 인분처리장에는 분뇨트럭들이 들락거리며 부산시내에서 수거한 인분을 쏟아부었고, 이곳에서 처리된 분뇨는 관로를 타고 하단으로 흘러가 낙동강 “똥다리”에서 낙동강으로 버려진다고 했다. 그 똥다리는 낙동강 하구 가운데 을숙도 쪽으로 꽤 길게 뻗어나가 있었고 을숙도에는 드넓은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하단 똥다리 조금 못 미쳐 나즈막한 동산이 하나 있있고 음악다방들과 달짝지근한 모과주를 파는 작은 술집들이 그 주변에 자리 잡아 제법 분위기 있는 공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에덴공원’이라고 불렀다.

낙동강 하구로 내려가면 다대포 해수욕장이 있었는데 낙동강 쪽 물은 따뜻하지만 똥물이라 께름칙하고 반대쪽은 깨끗하지만 차가운 물이라 해수욕객들은 양편을 번갈아 오갔다.

그런데 내가 75년에 제대하여 돌아왔을 때 대티고개 아래쪽으로 꼭 사람 콧구멍 두 개처럼 생긴 대티터널이 생겨났고 괴정동의 인분처리장도 없어졌다.

 

부산화력발전소는 앞으로 감천만을 내다보면서 감천 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감천만으로부터 해수냉각수를 취수하고 있었고 한 쪽에는 선착장과 하치장 저탄장이 있었고 또 넓은 재(灰)처리장이 있었고 꽤 넓은 공터를 사이에 두고 벙커-C유를 저장하는 거대한 저유탱크 4기가 있었다. 발전소 담장 너머에는 송도와 괴정을 잇는 도로가 나 있었는데 내가 영월에서 처음 왔을 때는 도로 아스팔트 포장이 발전소 담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끝나고 거기서부터 괴정 쪽으로는 아직 비포장 먼지길이었다. 장림과 다대포로 가는 도로도 물론 비포장도로였고 그 길로 버스들이 해수욕객을 싣고 먼지를 날리며 다니고 있었다.

 

도로로부터 부산화력 담장 안쪽에는 1,2호기와 3,4호기의 변전시설이 각각 있었고 1.2호기로부터 세 줄, 또 3,4호기로부터 세 줄, 도합 여섯 줄의 15만 4천 볼트 고압 송전선 두 줄기가 기다란 애자로 철탑에 주렁주렁 매달려 산을 넘어가고 있었고, 산자락 아래 비탈에는 허물어진 채 방치된 일본군 막사가 몇 개 있었고 밭들이 있었다.

 

감천만에서는 아직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직원들이 자주 가는 버드나무 횟집이라는 횟집이 있었다. 합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처음에 그 버드나무 횟집 들어가는 길목의 방앗간집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어느 날 버드나무 횟집에서 아나고(장어) 반 관을 200원에 사 가지고 얼음을 채워 넣어 들고 안동까지 동해남부선, 중앙선, 여덟 시간 기차를 타고 가서 아버지께 드린 적이 있다. 안동에 도착하였을 때 얼음은 다 녹아버렸고 스티로폼 박스 안에는 미지근한 물만 그득했지만 아버지께서는 그 아나고 회를 드시면서 얼마나 흐뭇해 하셨는지.... 아나고 회는 쉽게 상하는데 그걸 드시고 혹시 탈이 나신 건 아니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발전소 정문에서 비스듬히 맞은 편 2층에는 유정다방이라는 조그만 다방이 있었고 우리는 가끔 그 다방에 가서 커피에 달걀노른자를 넣은 50원 짜리 ‘모닝커피’를 마셨다. 어느 날 나는 그 유정다방에 들렀다가 그 뒤편에 있는 밭 400평이 평당 500원에 매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로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400평, 평당 500원이라, 그럼 2십만 원이네.”

내게는 20만원이 없었다.

내 한 달 봉급이 2만 5천원 쯤 되었었고 동아대학교 입학금이 8만 3천원이었으니 내게 그런 거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중에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왔을 때, 76년, 77년 무렵에 감천동네 땅값이 한 해에 10배씩 올랐다. 평당 500원이던 그 밭을 누가 샀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제대한 이듬해 76년, 그 땅은 평당 3만원이라고 했고 그 이듬해 77년에는 평당 30만원이라고 하더니 다시 한 해가 지나 78년에는 평당 3백만원까지 올랐다고 했다. 400평 그 땅이 평당 삼백만원이면 도대체 얼마야? 12억원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보수공단으로 가면서 퇴직금을 받아 괴정, 하단에 집을 산 직원들이 집값이 열 배씩 오르는 바람에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 것도 그 때였다.

 

고등학교 한 해 선배 중에 윤JY 선배가 있었다. 내가 군에 가기 전, 그러니까 72년엔가 그 선배는 알뜰하게 돈을 모아 사상인가 학장동에 열 세 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다. 내 기억에 분양가가 삼십 몇 만원이라고 들은 것 같다. 3년 남짓 발전소 교대근무를 하면서 일 년 봉급이 훨씬 넘는 삼십 몇 만원을 알뜰히 모아 13평 아파트를 분양받아 결혼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

 

고등학교 두 해 선배 중에는 그 보다 더 전설적인 한 분이 계셨다. 조SU씨는 돈 십원을 허투루 쓰지 않고 알뜰히 모아 감천, 괴정, 하단 여러 곳에 땅을 사 모았다. 돈이 조금 생기기만 하면 땅을 사 모았다. 그 400평 밭도 그 선배가 사지 않았나 모르겠다. 77년, 78년 무렵이 되자 그 선배는 수십억원 땅부자로 발전소에서 이름이 나 있었다. 수십억 부자가 되었지만 얼마나 돈을 아꼈던지 결혼기념일 자축연을 한다고 아내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사 주더라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되기도 했다.

 

아무튼 군에서 제대한 다음 복직하고 다시 학교에 복학한 나에게 그런 땅부자 이야기는 그림의 떡 이야기였다. 발전소 꼭대기에 앉아 감천동네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나의 쥐꼬리 봉급과 이 미친 땅투기 놀음과 집 한 칸 땅 한 평 없이 학교에 다니느라 허덕거리는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나는 뭐란 말인가? 혼자 계산해 보았다.

50평 대지에 30평짜리 단독주택을 지으려면 내 봉급으로 언제 가능할까?

50평 X 30만원 = 1,500만원, 주택건축비 합하면 대략 2,500만원, 그러면 내 봉급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12년 걸리겠군, 집만 지으면 그 동안 뭘 먹고살아? 틀렸군, 다 틀렸어.

학교 다닌 게 옳았던 건지, 어리석었던 건지, 학교 때려치우고 죽자 사자 돈 모아 땅을 사 모았어야 했던 것인지, 그러나 이젠 그 선택조차 뒤늦은 이야기, 아무튼 이제 집이나 땅이나 재산은 내게서는 아득히 머나먼 별세계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무엇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가 해주는 것은 나의 인사기록카드의 학력난에 ‘입사후 학력 대학졸업’이라고 기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무렵 국가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였다. 해마다 경제성장률이 10%를 훨씬 넘어 두 자릿수를 기록하였다. 1978년에는 드디어 국민소득이 1,000불을 넘고, 수출이 100억불을 돌파하였다. 인플레도 대단하여 물가가 한 해에 30% 가량 올랐고 화폐가치는 3년마다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죽어 가는 아들을 들쳐 업고 병원문을 열 몇 곳이나 두들기며 돌아다녀도 돈이 없다고 치료를 거절당한 끝에 아들을 죽게 하고 만 가난한 아버지의 사연이 신문에 난 것도 그 무렵이었고, 김대두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만나는 노인이나 여자들을 열 몇 명인가 망치로 때려죽이고 모두 합쳐 2만원도 안 되는 돈을 빼앗은 사건이 난 것도 1978년 그 무렵이었다.

 

봉급생활자는 이제 천민 노예계급으로 전락하는구나....., 난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땅투기로 엄청난 재산을 모은 분들이 계셨다. 한 분은 울산에다 땅을 사 모으고, 다른 한 분은 제주도 감귤농장과 서산 농장을 마련하셨다가 전두환 군사정권 때 220억원인가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셨다. 그러고도 87년 대선 때에 창당하여 대통령선거에도 나오고 그 뒤에는 국회의원도 되시고 총리까지 되셨다.

 

나는 1977년 아내와 결혼하여 감천합숙소를 나와 합숙소 뒤편 산비탈 동네에 60만 원짜리 전세 단칸방을 얻어 신접살림을 시작하였다. 한 달 봉급 10만 원 가량을 받아 학교를 다니던 내게 방을 얻을 60만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부모님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 지원을 받아 우리 부부가 얻은 단칸방은 주인집과 부엌을 함께 쓰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부엌의 왼편은 주인집이 쓰고 부엌 오른편 기역자 귀퉁이를 우리가 쓰도록 되어 있었는데 두 여자의 엉덩이가 서로 부딪힐 정도로 비좁았다. 방도 무척 작았는데 아내가 마련해 온 장롱 두 짝을 들여놓으니 그 비좁은 단칸방이 더 비좁아져 눕기도 힘들 정도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어느 날 밤이었다. 한 밤중에 장대비가 쏟아지는 요란한 소리 속에서 무언가 조그맣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군대에서 많이 무디어지긴 했지만 발전소에서 졸면서도 주변소리를 다 듣던 아직은 예민한 나의 청각이 그 조그만 소리를 잡아낸 것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윗목으로 몸을 끌어당겨 주인집 마루와 현관으로 통하는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랬더니 어두운 현관마루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구요?”

그 시커먼 그림자는 움찔하더니 “개새끼.” 한 마디를 남기고는 현관문을 도로 열고 나가버렸다.

‘나보고 개새끼라니, 도둑놈인 지가 개새끼지 내가 왜?’

그 빗소리 속에서 조심조심 현관문 유리창을 떼어내고 문고리를 벗겨 문을 열고 겨우 들어와 이제 막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참인데 무슨 인간이 개같이 귀가 밝아가지고 그 작은 소리를 듣고 깼느냐는 것 같았다.

그 검은 그림자가 나가고 난 다음에야 나는 소리를 쳤다, “도둑이야!”

주인집 아저씨가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왔다.

현관문은 잠가져 있었고 담장은 무척 높았는데 그걸 어떻게 뛰어넘었는지 그 검은 그림자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부엌 밖에는 주인집과 우리 집 연탄이 나란히 쌓여 있었다. 아내는 속상해 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우리 연탄을 자꾸만 갖다 쓴다는 것이었다. 또 자기네 연탄불이 꺼지면 꺼진 연탄을 우리 아궁이에다 슬쩍 바꿔 넣어놓고 우리 연탄불을 자기네 아궁이에 갖다 넣는다는 것이었다. 그 뿐 아니었다, 더러는 양념도 사라지고 반찬 만들어놓은 것도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어쩌겠나? 이게 셋방살이인 걸.’

 

그 비좁은 방에서 한 동안 살다가 우리는 좀 더 너른 방을 찾아 괴정동으로 이사를 했다. 역시 단칸방이었지만 금방 지은 새집이었고 방이 훨씬 넓었다. 전세는 20만원이 많은 80만원인가 그랬다. 주인은 아직 입주하지 않고 우리만 그 집에 먼저 입주해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야근을 하고 아침에 돌아오니 일이 일어나 있었다. 내가 야근을 들어가자 아내는 무섭다고 장모님을 불러 같이 잤는데 새벽녘에 갓난아기였던 아들이 자꾸 칭얼거리더란다. 장모님이 아이를 달래려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머리가 빙 돌면서 넘어지더란다. 연탄가스가 방에 스며든 것이었다. 만일 아들이 칭얼대지 않았다면 나는 한꺼번에 아내와 아들, 장모님까지 잃을 뻔 했다.

그제야 방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궁이로부터 배기관이 연돌을 지나 엉성한 시멘트 블록을 쌓아올린 굴뚝으로 나가고 있었는데 그 위를 대충 덮어 발라놓은 장판지와 얇은 도배지 사이가 떠서 틈이 나 있었다. 이렇게 엉성하게 집을 짓다니!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람이 죽는 것은 뉴스거리도 아니던 시절이었다.

 

아, 그 시절, 얼마나 많은 목숨이 연탄가스로 허망하게 사려져 갔던가? 내 안동중학교 한 해 선배 김DC님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직후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허망하게 가버리고 말았다, 홀어머니를 남겨놓고....

 

우리는 우리 집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까지나 단칸방 전세살이를 해야 할까? 어느 날 우리는 싼 집이 나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미동 산비탈 동네를 갔다. 산 아래에서 한참 등산을 하듯 올라가는 고지대였는데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이 위태롭게 보이는 거대한 바위 아래로 작은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수십 가구가 공동변소 한 개를 사용하고 있었고, 매물로 나온 조그만 집은 그 골목길 한 가운데 섬처럼 자리 잡고 있었고 달랑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있었고 창문으로는 골목길로 다니는 사람들의 발이 보였다. 평수가 열 평인가 된다고 했는데 200만원을 달라고 했다. 200만원이라는 돈도 없었지만 아무리 내집이라지만 그런 험악한 산비탈 동네에 그런 집을 사서 그렇게 산다는 것은 도저히 못 할 일 같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1979년 2월,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내가 졸업했다고 하니까 그 분은 나더러 이제 본사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본사 원자력건설부로 발령이 나 부산화력을 떠나게 되었다.

 

부산화력에서 군생활을 합하여 10년 세월.....

그 10년은 나의 청춘과 사랑과 아픔들이 떨어져 차곡차곡 쌓인 세월이었다.

그 10년 동안 부산의 땅값,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나는 학교에 다니느라 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다 놓치고 대신 대학졸업장과 아내와 젖먹이 아들 하나를 벌어 부산을 떠나게 된 것이다.

부산 곳곳에 남겨진 내 발자국들과 눈물과 추억들을 뒤로 하고 1979년 3월, 서른 살 가난뱅이 가장(家長) 나는 부산에서 번 아내와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단칸방 80만원 전세를 뽑아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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