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화력

28. 전차부대(電車部隊)

Thomas Lee 2022. 5. 14. 01:23

1998년 내가 한시퇴직으로 한전을 떠날 무렵 그 때, 1997년 기준으로 한국전력의 노동생산성은 1인당 연간전력판매량 6,520MWh이었고 그것은 당시 세계최고수준이었다. 미국의 일부 전력사들이 무지막지하게 합병, 다운사이징하고 잘라내서 7,000~8,000MWh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한전의 노동생산성은 일본 동경전력의 5,850MWh, 독일의 5,784MWh, 일본 중부전력의 5,271MWh, 미국 평균 4,865MWh, 대만전력의 4,154MWh, 프랑스의 2,940MWh를 압도하고 있었다.

 

90년대에 한국전력이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전력요금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결정적으로 원전 덕분이지만 이와 함께 한국전력 직원들이 그만큼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고 가장 많은 일인당 전력을 생산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한전직원들이 가장 열심히 일하면서 가장 낮은 저임금으로 허덕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임명한 장재식 사장은 한전을 “100억불 외채의 주범”, “복마전” “비능률과 무사인일”, “비대한 공룡 공기업”이라고 씩씩대며 부임해 와서 한시퇴직이라는 불법적 조치로 무려 2,369명의 직원을 감원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권에 잘 보이는 충성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미친 인간 같다.

 

그러나 사실 그 전에 이미 한국전력은 몇 차례 감원과 구조조정을 해 왔었다.

그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감원이라는 그 비정한 스토리......

내가 입사하던 1969년도에 한국전력 사장은 정래혁(丁來赫)씨였다. 나중에 국방부장관으로 영전하여 갔는데 1971년 8월에 일어난 실미도 사건으로 대국민 사과 TV 방송에서 눈물을 흘리며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 양반이 한국전력 사장으로 올 때 고향지방(전라도) 사람들 거의 2천명을 데리고 와 한국전력에 취직시켜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진위는 내가 알 수 없다. 아무튼 내가 입사하던 해 한전의 전체 종업원수는 약 14,000명이었다.

14,000 명......, 사실 당시의 한전의 전체발전설비용량 163만 7천 ㎾에 비하여 인원이 너무 많았다. 생각해 보라. 원전 2기 발전용량도 안 되는 163만 7천 kw에 종업원수가 14,000 명이나 되었으니 그야말로 후진성, 낙후성, 영세성이 회사의 전체 구석구석 꾀죄죄하게 묻어 있었다고나 할까.

 

당시 한전본사는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었고 본사인원이 500명쯤 되었는데, 전국에서 가장 큰 사업소는 본사가 아니라 600여명 인원을 자랑하는 영월화력발전소였다. 1969년 8월, 나는 마산화력에서 5개월 가까이 수습교육을 받고나서 머나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동강(東江)가에 자리 잡은 영월화력발전소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도착하던 69년 8월 9일 그 날은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처음 내 눈에 비친 것은 시꺼먼 괴물이 엎드린 것 같은 발전소, 여덟 개의 구화력 굴뚝, 그리고 2 개의 신화력 굴뚝으로 피어오르는 흰 연기, 발전소 주변의 산과 강을 온통 뒤덮은 석탄가루와 재, 온통 새까만 풍경이었다. 그리고 30리 떨어진 탄광에서 석탄을 싣고 발전소 뒷산을 넘어온 삭도(케이블카) 버킷을 쏟아 석탄을 내리고 석탄에 섞인 괴탄과 돌덩어리를 골라내고 보일러에서 나오는 재를 쳐내고 처리하느라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일하는 수많은 새까만 사람들이었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에는 미세한 재가 섞여서 함께 날아갔다. 그 비산재(Fly Ash)를 잡기 위해 기계식 싸이클론 세파레이터(Cyclone Separator)로 집진(集塵)하고 있었는데 집진효율이 80% 정도에 불과하여 재(災)가 사방 수십 리 인근에 눈처럼, 서리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당시의 영월화력을 좀 더 설명하면 그렇다. 왜정 때인 1931년엔가 준공된 영월 구화력은 보일러 8대에 터빈 4대로 총 10만 ㎾의 전력을 생산하였고 1965년에 새로 건설된 신화력은 5만 ㎾짜리 2기로 10만 kw, 그렇게 구화력, 신화력 합쳐서 설비용량이 도합 20만 kw였는데 이는 한전 전체 발전설비의 약 8분의 1을 차지하는 규모였다. 당시로서는 큰 발전소였지만 지금으로 친다면 원전 1기의 5분의 1 용량밖에 안 되는 발전소에 무려 600여명의 인원이 바글바글 일하고 있었던 셈이다.

 

신화력은 조금 낫다 할 수 있었지만 구화력은 그야말로 구닥다리 고물, 골동품이였다. 석탄과 재로 온통 새까만 건 둘 째 치고, 이건 도무지 자동(Automatic)이라는 것은 없이 모두 손으로 조작하는 것이었다. 8대의 보일러 옆에 8명이 쭈그리고 앉아서 밤새도록 보일러 드럼의 수위계를 쳐다보면서 밸브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수위(水位: Water Level)를 맞추는 식이었다. 그렇게 발전소 구석구석, 배전반, 터빈실, 보조기기실, 급수펌프실, 물처리실, 취수펌프장 등에 운전원들이 배치되어 계기를 읽고 온도를 재고, 스위치와 밸브를 조작하였다. 혹시 실수라도 하거나 잘못 되어 급수가 끊기거나 모자라 보일러드럼 바닥이 드러난다면 그야말로 보일러 구워먹는 대참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 모양으로 어떻게 발전소를 40년 세월이나 돌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이런 식이었으니 영월화력 전체 종업원이 600여명에 달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8시간마다 교대하는 4조 3교대 운전부서만 해도 1 교대 인원만 구화력이 60명, 신화력이 40명, 도합 100명, 4개조 도합 400여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사무직원, 경비원, 차량운전원 등을 합쳐 총인원이 600여명이나 되었다.

 

이 구화력 발전소는 1972년 8월 한강유역에서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동강 대홍수 때 흙탕물에 잠겨버렸다. 진흙탕 물에 잠겼던 터빈실과 제어실에서 물이 빠지자 커다란 잉어들이 퍼덕거렸단다. 그렇게 대홍수 강물에 잠겨 정지된 구화력은 1976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복합화력이 들어섰다. 그 복합화력도 20년 쯤 돌리고 낡아서 폐지하려고 했는데 미국에서 비싸게 돈 주고 사간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석탄미분기운전원으로 일했던 신화력 1,2호기는 그 후로도 2001년까지 가동되면서 동해화력과 함께 무연탄을 때면서 인근탄광들을 먹여 살렸다고 들었다.

아무튼 1972년 8월 동강 대홍수로 구화력이 정지된 다음 구화력에서 일하던 3~400명의 인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용원들이나 일부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났겠지만 한전소속의 직원들은 전국의 다른 사업소와 발전소로 분산 배치되었다.

 

아쉽게도 나는 전차(戰車 아닌 電車)를 구경만 하고 타보지 못 했다. 1968년 9월 공고 3학년 때 한국전력 입사 필기시험을 보러 난생 처음 부산에 갔을 때 부산에 전차가 다녔었는데 구경만 하고 타보지 못 했다. 10월 한국전력 입사면접시험 보러 난생 처음 서울에 갔을 때도 종로와 시청 앞을 지지직거리는 스파크와 함께 굴러다니던 전차를 구경만 하고 역시 타보지 못 했다. 요금이 학생 5원 일반 10원인가 그랬는데..... 서울의 전차는 그 해 1968년 12월 31일을 끝으로 철거되었다. 부산의 전차 역시 내가 영월에 있던 1969년 12월 31일자로 철거되었다. 전차들이 그렇게 철거될 줄 알았더라면 그 때 타볼 걸.......

 

아무튼 당시 전차는 한전의 사업분야였고 한전이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가 쌍문동 연수원에서 신입사원교육을 받을 때 배운 회사 정관(定款)에는 한국전력의 사업분야가 “전력사업과 전원개발사업”, “전력 송배전과 판매”, 그리고 “궤도전차 사업”과 “와사 제조와 판매” 사업으로 되어 있었다고 기억난다. ‘와사(瓦肆)가 뭐냐니까 ‘와사’는 ‘애자(㝵子?)’라고 했다 ‘애자’가 여자 이름 같아서 모두 웃었는데 ‘애자’는 송전선을 매다는, 접시처럼 생겨 죽 연결되는, 절연 도자기 같은 거라고 했다. 아무튼 그 때 한전의 사업분야에는 전차사업도 포함되어 있었고 와사제조 사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차운전원이나 정비원 역시 한전소속 직원이었다. 1968년말 서울의 전차가, 그리고 1969년말 부산의 전차가 운행중단, 철거되자 한전은 이들 전차운전원과 정비원들을 다른 사업소로 분산배치 발령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발전소 운전원으로 발령받아 왔다. 내가 일하던 부산화력발전소에도 여러 분이 부산전차사업소로부터 전입되어 와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분들을 ‘전차부대’라고 불렀다. 그 분들은 연세가 많았고 대부분 영어 알파벳조차 읽을 줄을 몰랐다. 매시간 각종 계측기를 읽고 그 수치들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는 Log Sheet라고 부르는 발전소 운전기록용지는 영어로 되어 있는데, 그 분들은 영어를 읽을 줄 모르니까 우리 젊은 친구들한테 물어서 빈 기록지에다 엉터리 발음과 뜻을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Boiler Steam Drum Pressure: 보이라 스팀 도라무 프레샤 (보일러 증기드럼 압력)”

“Auxiliary Lube Oil Pump: 오기자리 루부 오이루 뽐뿌 (보조윤활유펌프)”,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그 분들의 전차운전 경험을 흥미롭게 듣기도 했다.

“우린 전차도 공짜로 탔어. 아침에 전차 운전원 유니폼을 쫙 빼 입고 출근하는 기분도 삼삼했지. 전차가 서대신동에서 출발하여 남포동, 광복동을 지나고, 부산역, 부산진역을 지나면 그 때부터 동래역까지는 속도를 자동으로 착 놓고 냉냉냉냉 신나게 달리는 거야, 그러면 동래역까지 금방 가지. 그 동안 사람도 몇 명 깔았어. 전차에 깔린 시체는 너무 끔찍해. 그런데 처음엔 끔찍했지만 나중엔 별 생각도 없어지더구만....”

“우와, 사람도 죽였어요?”

그 사람 몇 죽였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겐 대단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정래혁 사장님의 후임은 역시 군장성 출신이요 나중 향군회장이 되었던 김일환씨였는데, 이 분은 얼굴 모습도 둥글 넉넉하고 성품도 온화하여 사업소에 순시를 오면 직원들을 모아놓고 격려사를 하고 금일봉을 내놓고 나서 자기가 먼저 박수를 짝짝 치던 순박한(?) 분이셨다. 그 분이 사장님이셨을 때는 별 일이 없었다.

그 다음 사장님이 문제였다. 역시 군출신인 김상복씨였는데, 이 분이 부임하여 1972년 봄에 화끈하게 감원을 단행하셨다. 주로 저학력자와 고령자가 타깃이 되었는데 그 수법이 좀 뭣 했다. 부산화력에 근무하는 사람을 강원도 화천수력이나 영월화력에 발령을 내고 서울에 근무하던 사람을 울릉도 추산수력에 발령하는가 하면, 보직을 박탈하여 본사대기근무발령을 내고 수당을 깎는 등, 사표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하는 치사, 야비한 방식이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간 물가상승율이 20%, 30%가 넘는 그 때 한전봉급을 3년간이나 동결하였다. 이리하여 한전의 좋은 시절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ROTC 정복 경례사건으로 학교에 다니던 직원들이 모조리 자퇴를 하고 내가 군대에 끌려가게 된 것도 바로 이 김상복 사장 때였다.

 

1972년 봄 김상복 사장님의 무자비한 구조조정 때 나는 부산화력에서 보일러 운전원으로 교대근무를 하면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우린 그 때 이십대 초입의 철부지들이었다. 회사에서 그런 엄청난 감원 회오리바람이 불어도 그건 노인네들과 저학력자들의 일이요,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졸입사자가 무슨 그런 교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우습지만 당시만 해도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분들에 비하면 우리 고졸 사원들은 젊은 고학력자에 속하였다.

 

어느 날 저녁 때 우리는 합숙소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는데 술 취한 계장님 한 분이 오시더니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며 당구공을 집어 냅다 던지셨다. 같이 당구를 치던 친구녀석이 재빨리 엎드려서 당구공은 그 친구 머리 위를 지나 유리창을 ‘와장창’ 박살내었고, 두 번째 던진 공은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엉겁결에 손으로 막아 다치진 않았지만 하마터면 내 골통이 깨질 뻔했다. 그 당구공을 정통으로 맞았다면 내가 일찌감치 구조조정의 희생자(?)가 될 뻔 했다. 우린 당구장 밖으로 쫓겨 나왔는데 그 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 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의 대규모 구조조정은 내가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부산화력에 복직한 다음 해인 1976년도와 1977년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이번엔 김영준 사장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역시 저학력자와 고령자들이 표적이었는데, 이번엔 좀 점잖은(?) 방법이 동원되었다. 연수원 교육발령을 내는 것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평가시험을 봐서 성적이 나쁜 사람은 보직을 안 주고 대기발령을 낸다는 것이었다.

 

1972년도의 감원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으셔서 그 동안 영어 읽는 법도 좀 배우시고 이젠 발전소 구석구석 환히 꿰는 수준에 도달하신 ‘전차부대’ 석씨도 그 때는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사표를 내셨다. 그 분은 퇴직금 천 몇 백 만원인가를 받아 가지고 부산 남포동 부영극장 뒷골목에 조그만 술집을 내셨는데 우리가 가보니 이 양반 술장사 제대로 하긴 글렀구나 하는 측은한 생각만 들었다. 도무지 장사체질도 아닌데다, 그분의 눈에 그렁그렁 고인 울분 같은 느낌은 술맛을 돋우기는커녕, 오는 손님도 쫓아버리기 딱 맞은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 한전은 또한 발전소 보수부서를 독립시켜서 보수공단인가로 발족시켰으니 분할매각과 아웃소싱의 시초였던 셈이다. 부산화력에서도 20명 넘는 보수부서 인원이 퇴직금을 받고 한전이 아닌 보수공단 직원이 되었는데, 퇴직금으로 괴정, 하단 일대의 신개발지에 집을 산 사람은 1, 2년이 못 되어 집값이 다섯 배, 열 배씩 뛰는 바람에 졸지에 부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보수공단은 후일 한국중공업에 흡수통합 되었다가 다시 분할되어 한국전력보수주식회사가 되었고 다시 이름을 바꾸어 한국전력기공이 되었다.

 

그러나 보수부서를 독립시켜 보수공단으로 만들고 아웃소싱으로 하는 것이 회사경영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을까? 나는 암만 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우리 운전부서가 야간근무를 하다가 발전소의 기기에 이상이 생기거나 손상되면 우리는 TM(Trouble Memo)라는 용지에 그 내용을 기록하여 아침에 출근하는 보수과 직원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면 기계과, 전기과 보수부서가 기기를 수리하거나 교체하였다. 그런데 보수공단이 독립되어 나가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간단하게 TM 한 장으로 처리되던 업무가 부서장, 소장의 결재를 거쳐 공문으로 보수공단에 발송되고 그런 다음 보수공단에서 내부절차를 거쳐서 작업인력이 출동을 하게 되니 우선 시간부터 많이 걸리게 되었다. 보수비용도 무슨 무슨 비용에다 무슨 무슨 경비에다 무슨 무슨 단가를 적용하고 인건비도 시간당 단가로 계산하여 청구하는 식으로 복잡해졌다. 20명 남짓 하던 보수부서 인력은 사무직원도 늘어나고 그 밖에 필요한 부수적 인원들도 점점 늘어나더니 금방 100여명을 헤아리게 되고 통근버스도 두 대나 운행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되면 도대체 그 간단하게 끝나던 보수작업 비용은 얼마나 늘어나는 것일까?

 

여러 해가 지나고 내가 서울 본사, 원자력건설부서에 근무하던 1980년도에 또 한 번 대규모 감원이 있었다. 전두환 국보위 시절이었는데, 이때는 부서별, 사업소별로 감원목표를 할당하고 부서책임자가 소속 부하직원 가운데서 감원대상자를 적어내는 방식이었다. 참으로 살벌했다.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감히 말 한 마디 못 하고 보따리를 싸야 했다. 이름을 적어내야 하는 사람이나 이름이 적히는 사람이나 사람 할 짓이 못 되는 일이었다. 한 분은 자신이 감원대상이라고 통지 받자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가에 다가가서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였다.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다행히도 그 창문은 반쯤밖에 안 열리는 것이었다. 또한 노조도 이 틈에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장기집권 어용노조 체제를 확립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때 쫓겨난 사람들은 10여년 후 명예회복과 복권을 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일까, 세월이 다 흐른 다음에야.

 

그리고 그로부터 18년이 다시 흐른 1998년 12월 16일, 이번엔 내가 IMF 구조조정으로 한시퇴직이라는 이름으로 떼밀려 나왔다. 이번에는 장기근속자가 타깃이었다. 회사에 오래 붙어먹은 사람이 나가라는 것이었다. 안 나가면 무보직발령에 봉급삭감, 그리고 퇴직금이 삭감되는 불이익이 가해질 것이라고 하였고, 사업소에는 무보직심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나는 공고를 졸업하고 열여덟 살 나이로 입사한 덕분에 나이 마흔여덟 살에 30년 근속한 장기근속자가 되어 살생부 앞부분 20번째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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