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화력

27. 부산화력 노조위원장 선거

Thomas Lee 2022. 5. 14. 01:21

지금 대한민국은 노조의 천국이요 노동자 낙원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해마다 노조파업이 벌어지고, 붉은 띠를 맨 노조원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각목과 새총, 돌멩이와 볼트너트가 날아다니고 최루탄이 터지는 극한투쟁도 심심찮게 벌어졌고 현대자동차 노조니 금속노조니 화물연대니 희망버스니 하는 이름들도 우리 귀에 익었다. 그리고 지금은 민노총이 정권까지 흔드는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온순한 순둥이 노조는 어디일까? 아마도 전국전력노조, 즉 한전 노조가 아닐까 싶다. 전국전력노조는 1961년 5.16 군사혁명 전에 있던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3사가 통합되어 한국전력주식회사로 발족한 다음 3사의 노동조합도 통합되어 통합노조라는 뜻으로 ‘전국’을 앞에 붙여서 ‘전국전력노동조합’이 되었다.

 

내가 1969년 열아홉 살 나이로 한국전력에 입사하여 영월화력발전소에 발령받아 석탄미분기 운전원이 되어 깜둥이 생활을 할 때 같은 발전과에서 함께 교대근무하던 선배직원들 중 이름이 특이한 몇 분이 지금도 기억난다. 주임이었던 김두목씨는 영월화력에 전입한 우리를 2주일 동안 맡아 교육하신 분이다. 그 분의 그 이름 때문에 우리는 졸지에 두목씨의 졸개부하가 되었다. 그 외에도 김석두씨, 이현병씨, 이영희씨. 태풍작씨......

 

축구를 좋아하던 김석두씨는 술도 무척 좋아해서 거의 매일 소주에 쩔어 계셨는데, 지금 살아 계신지 모르겠다, 이 분이 한 번은 내게 노조 이야기를 해 주셨다.

“5.16 혁명 전에는 말야, 그러니까 한전 생기기 전 민간삼사 시절엔 여기 영월발전소가 조선전업 소속이었는데, 그 때 노조 참 막강했지.”

“아, 그랬어요?”

“그랬지. 한 번은 말이야, 노조위원장이 급전사령실에서 3사 사장들을 불렀어.”

“노조위원장이 3사 사장들을 한꺼번에 불러요? 우와.”

“응, 그 때는 그랬어. 임금협상이 잘 안 되니까 노조위원장이 급전사령실에 가서 사장들을 불러놓고 호통을 쳤어. 봉급을 올려줄 거요, 안 올려줄 거요? 지금 전국의 발전소들이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소, 발전소들을 정지시킬 거요.”

“허, 그랬어요?”

“그랬지. 그래서 사장들이 두 손 들었지.”

참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같은 이야기였다.

 

1961년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1969년 내가 입사한 다음 쌍문동에 있던 연수원에서 교육받을 때 노조 단체행동에 관하여 들은 것 두 가지가 생각난다.

1. “한국전력은 국가기간산업체이기 때문에 노조는 제한적인 태업은 가능하지만 파업은 금지된다. 만일 파업을 하면 국가안보 위해사범으로 파업주동자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2. “초급간부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계장으로 승진하면 노조에서 자동으로 탈퇴되어 회사측이 된다.”

시험에 합격하여 계장으로 승진하면 자동으로 노조에서 탈퇴되어 간부직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즉 한국전력의 노조는 시험에 떨어져 승진하지 못 한 패잔병(?) 직원들과 기능직 직원들로 구성된 노조라는 이야기다.

 

노조는 평직원들, 즉 맹원들의 월급에서 1%씩 노조 맹비를 꼬박꼬박 떼어갔다. 사업소 노조는 여름철에 가까운 해수욕장에다 체력단련장이라는 텐트를 치는 것과 가을에 한 번 가을체육대회를 개최하는 것, 그리고 직원들의 경조사 챙기는 것 말고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노사대등관계라 하여 사업소 노조 위원장님은 소장실 맞은편에 소장실과 비슷한 크기의 사무실에 번듯한 책상과 회전의자를 놓고 ‘노조위원장’이라는 큼지막한 명패를 놓고 비서도 두고 계셨다. 노조위원장 뿐 아니라 노조위원장이 지명하는 몇 사람의 직원들도 전임이라 하여 회사일이 아닌 노조업무를 하였는데 봉급은 회사에서 그대로 지불된다고 하였다. 노조위원장의 임기는 3년인가 그랬는데 노조위원장을 새로 뽑는 해가 되면 그 노조위원장 자리를 놓고 용호상박, 박 터지고 피 터지는 선거전이 벌어졌다. 후보들이 난립하고 그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밤마다 직원들을 술집에 끌고 가서 흥청망청 접대를 했다.

 

내가 군에서 제대를 하고 부산화력에 복직한 이듬해였던가, 그해에도 치열한 사업소 노조위원장 선거가 벌어졌다, 홍SM이라는 분이 그 때까지 노조위원장이었는데 여기에 도전장을 낸 강력한 도전자가 있었고 술대접과 선물공세가 난무하는 치열한 선거운동 끝에 직원들의 여론은 “갈아보자.”는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 같았다.

 

드디어 투표일이 다가왔다. 직원들은 교육장에 마련된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했다. 그리고 이어서 개표가 진행되었다. 도전자의 표가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서무과 직원이 오더니 도전자가 본사 발령으로 오늘자로 해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어이없는 날벼락이었다. 개표는 중단되었고 부산화력 노조는 사고노조로 본사 노조본부에 보고된다고 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현 노조위원장이 본사에 손을 써서 도전자를 해임하도록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노조위원장님은 만면에 웃음을 띄고 각 부서로 돌아다니면서 ‘구관이 명관이다, 앞으로 더 잘 하겠다. 갈면 뭐 하겠느냐?’면서 아양(?)을 떨고 다녔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노조간부들을 데리고 투표함을 들고 이 부서, 저 부서를 돌아다니며 직원들에게 개별투표를 하도록 했다. 교대근무를 하는 운전부서들도 야간에 방문하여 투표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당선되었다면서 연임한다고 했다. 참 대단한 노조위원장님이셨다. 그 일 뿐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인원정리를 하는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노조위원장 자리를 넘보던 황GS씨 같은 도전자들이 졸지에 머나먼 다른 사업소로 발령 나기도 했다. 노조위원장 자리가 그렇게 대단한 자리였는지......

 

한국전력의 초급간부임용고시는 1년이나 2년에 한 번 정도 있었다. 당시의 한전 초급간부임용고시는 그야말로 치열한 입시경쟁이나 과거시험 같았다. 계장이 되려는 직원들은 고시에 합격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공부방을 만들어놓고 몇 년이나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분은 초급간부고시 합격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집 앞 길거리에서 마중 나온 어린 딸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이렇게 치열하던 초급간부임용고시는 70년대를 거쳐 8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전이 커지고 조직이 늘어나면서, 특히 원자력직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한결 쉬워지긴 했지만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법고시처럼 어렵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좁은 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직원이 초급간부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승진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몇 차례 도전 끝에 포기하는 직원들도 많았고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는 직원들도 많았다. 결국 회사 입장에서는 쓸 만한 직원들은 초급간부가 되어 회사측이 되고 능력 없고 실력 없는 직원들만 노조원으로 남게 되는 셈이었다. 그런 노조가 무서울 일이 있겠는가? 한국전력은 본사와 사업소에 노조위원장 자리와 전임노조원 자리를 마련해주고 적당히 당근을 제공하는 것으로 수십 년 동안 순둥이 노조와 아름다운(?) 노사화합을 이루어 올 수 있었던 셈이다.

 

해마다 전국전력노조 위원장님이 회사측과 임금협상을 하긴 했지만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전의 집행예산은 경제기획원이 틀어쥐고 있었다. 해마다 경제기획원이 정해주는 인건비 예산 범위 안에서 봉급이 결정되었다. 노조가 아무리 봉급인상을 요구해봐야 경제기획원이 정해준 예산범위를 초과하는 인건비의 집행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였다.

 

실질적으로 급여를 결정하는 주체가 정부라면 노조는 당연히 정부에 쫓아가서 경제기획원 장관과 마주 앉아 임금협상을 하고 투쟁을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힘없는 순둥이 한전노조는 또 힘없는 한전과 마주 앉아 정부가 정해준 인건비 예산을 놓고 그 안에서 임금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하후상박(下厚上薄), 즉 위는 박하게, 아래는 후하게 나눠먹기였다. 이를테면 정부가 인건비예산을 3% 늘려주면 아랫직급 8직급은 5% 인상, 6, 7직급은 4% 인상, 간부인 4직급은 2% 인상, 3직급은 1.5%, 2직급, 1직급은 동결, 이런 식으로 나누어먹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 하후상박을 몇 십 년 하다 보니 나중엔 위아래 봉급수준이 거의 같아져 버렸다.

 

아무리 국가기간산업이라지만 한국전력의 이 같은 노조 다루기는 명백히 위헌이고 법률위반이다. 간부직원이라고 하여 노조에서 탈퇴시켜 회사측이라고 하는 것 역시 위법이다. 헌법은 근로자의 단체행동을 보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상법은 주주의 업무집행권 위임을 받은 경영자와 임원만을 회사측으로 보며 업무집행권이 없는 일반직원들은 종업원으로 본다. 그러므로 계장시험에 합격하였다 하여 노조에서 탈퇴시켜 노조활동을 하지 못 하게 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인 것이다.

 

내 기억에 80년대 들어 간부직원들의 노조가입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다. 그러나 노조가 완강히 반대한다고 들었다. 간부직원들이 노조에 가입하면 자기들이 자리를 다 빼앗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간부직원들도 노조가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박봉에 노조에 가입되면 맹비 1%만 뜯긴다는 생각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도 다른 공기업은 간부직원들까지 노조소속인 경우가 많은데 한전 노조는 여전히 하위급 평직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아무튼 그런 순둥이 한전노조...., 내가 한전에 근무한 30년 동안 한전노조는 파업이나 태업이나 투쟁 같은 것을 하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정부에 쫓아가서 항의하거나 피켓을 들어본 적도 없다. 언제나 정부가 정해주는 인건비예산 범위 내에서 하후상박, 고분고분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그래서 내가 입사하던 1969년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았던 한전의 봉급수준은 1998년, 내가 한전을 떠날 때에는 23개 공기업 중에서 꼴찌라고 했다. 정부는 만만한 한전을 공기업 대표라 하여 언제나 절감과 긴축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우리는 박봉에 허덕이며 국가경제발전을 위한 기간산업 역군으로 일했다.

 

순둥이 한전노조는 30년 동안 하후상박만 했던 게 아니다. 호구, 등신노릇도 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공기업들의 퇴직금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국영기업들의 노조를 윽박질러 퇴직금을 대폭 삭감하도록 강요했다. 퇴직금을 3분의 1 수준으로 줄이는 내용으로 합의안을 만들어놓고 국영기업들의 노조위원장을 체포(?)하여 서명을 하도록 했다. 모든 국영기업 노조위원장들이 잽싸게 피신하여 몸을 숨기고 서명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순둥이 한전 노조위원장님만 대표로 순순히 체포되어 순순히 서명했고 덕분에 우리의 퇴직금은 삼분의 일 토막이 되고 말았다.

 

그 뿐 아니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임명한 장영식 사장은 노조(권원표 위원장)와 임금협상을 하였는데 공기업 꼴찌 수준이던 한전의 봉급을 인상하기는커녕 IMF경제난 극복과 고통분담이라는 구실로 한 달 봉급 가량이나 삭감하는데 합의한 다음 직원들의 상여금과 체력단련비에서 세 차례에 걸쳐 삭감하였다. 나도 당시 한 달 봉급이 넘는 230만원이나 삭감당하였다. 어처구니없었다. 등신 같은 노조위원장 때문에 회사측인 내가 왜 봉급삭감을 당해야 하냐 말이다. 1998년 10월 26일, 장영식 사장은 이렇게 빼앗은 직원들의 봉급 465억원을 산업자원부 장관에게 실업기금으로 기탁하였다. 직원들에게서 빼앗아 465억원을 실업기금으로 갖다 바친 건 명백히 강탈이며 횡령이며 불법행위다. 나는 퇴직 후에 이 사건을 검찰에 고발하였는데 허세진 검사가 깔아뭉개고 말았다.

 

또 장영식 사장은 국가 대표공기업인 한국전력이 IMF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구조조정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면서 대규모 감원을 하여 2,369명을 한시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퇴직 시켰는데 이 때에도 권원표 노조 위원장은 한 마디 항의도 못 하였으니 한전노조나 한전노조위원장은 그야말로 허수아비, 바지저고리였던 셈이다. 나중에 권원표 위원장은 한전노조위원장을 오래 했다는 경력으로 한국노총위원장이 되었는데 등신 같은 인간이 엉뚱한 재주는 있었는지 무엇인가 한 건 해 먹고 발각되어 물러났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권원표씨가 아직 한전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때 순둥이 한전노조가 역사상 딱 한 번 파업을 했다. 2000년, 김대중 정권이 한국전력을 일곱 토막으로 쪼개어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발전회사들을 해외매각하려고 할 때였다. 노조가 이 때 처음으로 파업이라는 걸 했다. 그러나 평직원들로만 이루어진 파업은 큰 파급력이 없었다. 한전은 간부직원들을 동원하여 평직원들의 빈자리를 메웠고 파업은 큰 문제없이 마무리되었다. 만일 김대중 정권이 투자보수율 15%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한국전력의 발전회사들을 해외에 팔아먹었다면 대한민국은 일찌감치 패망했을 것이다. 나는 그 때 팍스넷이라는 웹사이트 토론방에 ‘맨날느저’라는 필명으로 한전매각반대 글을 열심히 올렸었다. 그 글들을 많은 한전노조원들이 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새천년민주당 김방림 의원도 한전매각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한전 노조의 역사상 최초의 파업 때문이었는지 다행히 한전 해외매각은 중단되었다.

 

아무튼 ‘한전해외매각 반대“의 그 유일한 파업의 뒤로도 한전노조는 여전히 순둥이 노조인 듯 하다. 한전이 일곱 토막으로 쪼개지고, 노무현 정권이 쪼개어진 일곱 토막 한전을 한전본사는 나주로, 한수원은 경주로, 5개 발전자회사들은 방방곡곡으로 고기토막 같이 선심 쓰듯 이리저리 나누어 던질 때도 노조 또한 아무 소리 않고 따라갔고 또 나누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노조위원장 자리와 전임노조 자리라는 당근을 받아먹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20여년 가까이 지난 다음 이번에는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이라는 쓰나미가 또다시 한전을 덮쳤다. 2016년 4조 8천 800억원에 달했던 한전의 영업이익은 2년만에 2조 2천억원의 적자로 돌아섰고 한전공대에다 태양광 풍력전력구입 조건으로 한전의 적자와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쯤 되면 한전 노조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간부직원들도 그렇다. 노조소속이 아니라 해서 구경이나 하고 주는 봉급이나 타먹고 앉아 있어야 할 것인가?

한전의 노조원들과 회사측 간부직원들에게 묻고 싶다.

너희가 한전을 사랑하느냐? 너희가 이 나라를 사랑하느냐?

너희에게 머리는 달려 있느냐?

 

그리고 한전과 정부에도 한 마디 더,

“나쁜 인간들, 헌법이 보장하는 근로자로서의 나의 권리도 박탈하고 30년간 착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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