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화력

26. 산업재해사고

Thomas Lee 2022. 5. 6. 13:07

“사고 책임 질 ‘빨간 줄 임원’까지 만들었다. 건설사 중대재해법 초비상....”

2022년 새해가 되자 1월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건설업계엔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이다. 안전사고가 나면 경영자를 형사처벌까지 할 수 있도록 하는 법 때문에 중견 건설사 오너들이 줄사퇴해 ‘월급쟁이 대표이사’를 세우고, 대형 건설사들은 사고 때 법적 책임을 뒤집어쓸 안전 담당 임원 자리, 즉 ‘빨간 줄 임원 자리‘를 신설하는 등 난리란다. 지금부터 3년 전 쯤 2018년 12월에도 태안화력에서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석탄 컨베이어에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머리는 이쪽에 몸체는 저쪽에 등을 갈려져서 타버렸다’고 했다. 이런 소식을 들으니 내가 열아홉 살 때부터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석탄가루, 아황산가스를 마시며 일하긴 했지만 사지멀쩡하게 일흔을 넘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만 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50년 전 그 때 한전의 종업원에는 크게 세 분류가 있었다.

첫째는 대개 공채를 통하여 채용된 정식직원이었다. 나처럼 공개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입사하는 경우다. 1968년 당시에 기술직 전공별로, 또 사무직으로 대졸신입사원공개고시가 있었고 고등학교와 전문대학을 합쳐서 공개고시 입사시험이 있었다. ‘자녀대체’라 하여 직원이 퇴직하면서 자녀를 직원으로 채용해주는 제도도 있었다. 우리가 입사한 다음 해에는 고졸공개고시가 없었고 학교별로 할당되어 성적순으로 상위자를 뽑았다.

 

둘째는 기능직이었다. 차량운전, 사무보조원, 비서직, 교환원 등과 발전소나 변전소 등에서 단순작업을 하는 기능직이다. 대표적으로 전기원이 여기에 해당된다. 기능직은 8직급으로 분류되었다.

셋째로 일용직이다. Daily basis, 하루하루 근로를 제공하고 일당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입사하던 1969년 당시 이들이 받는 하루 일당은 300원이었다. 한 달 동안 휴일을 빼고 일하거나 교대근무를 하면 6,900원이나 7,200원 정도가 한 달 수입이 되었다. 신입사원이던 내가 2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으면서 저분들은 저 돈으로 어떻게 생활을 하나 싶었다.

 

그 외에 경비를 담당하는 청원경찰이 있었다. 한전 소속은 아니었고 경비인력을 제공하는 업체에 채용되어 한전에 파견하는 식으로 운용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중에 한전에 기능직으로 채용전환 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이렇게 종업원의 채용방식과 처우가 달라 은연중 흡사 중세시대 계급사회 같은 차별의식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전의 여러 직무, 직군 중 사무직이나 기술직은 아무래도 재해사고에 노출될 위험은 적은 편이다. 그러나 기능직, 그 중에서 특히 전선주를 오르고 전깃줄을 만져야 하는 전기원은 사고가 흔히 일어나는 위험한 기능직 직군이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전선주를 오르는 전기원들에 대한 처우가 좋은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1969년 2월, 내가 입사하여 쌍문동 사원연수원에서 신입사원 초등반 교육을 받을 때 본 광경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의정부행 시외버스에서 내려 북한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양편으로 논이 있는 가운데로 난 진입로를 따라 연수원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넓은 운동장이 있었고 운동장을 지나면 약간 오르막 언덕에 2층 건물이 있었고 그 중앙에 1층 공간이 뻥 뚫어져서 흡사 무슨 개선문이나 일주문 들어가듯이 되어 있었는데, 그 건물 앞 길 아래 공터에 훈련용 전선주들이 열대여섯 개 줄줄이 서 있었다. 전선주에는 발을 딛고 올라가는 철물이 박혀 있었고 꼭대기에는 전선과 애자, 변압기 같은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주로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고 간간이 평가시험을 보는 식으로 4주간의 연수일정이 짜여져 있었지만 그 시간 전기원들에 대한 교육은 군대 유격훈련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이 새끼, 정신 차려. 그 따위로 하다간 죽어!”

훈련교관(?)은 욕설을 섞어 소리를 지르고 훈련받는 전기원들은 안전장구를 몸에 매달고 높은 전선주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더러 발길질, 손찌검도 하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 자칫 실수라도 하면 추락이나 감전으로 목숨을 잃는 위험한 전기원의 특성상 철저한 직업훈련은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속으로 우리가 그런 혹독한 훈련을 받지 않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또, 나중의 일이지만 1970년대 들어 한전은 기계, 전기, 계기 등 보수부서를 따로 분리하여 직원들을 퇴직시킨 다음 ‘보수공단’인가 뭔가 하는 보수전문업체를 만들어 발족시켰고, 이 보수업체는 여러 차례 이름도 바뀌고 회사의 주인도 여러 차례 바뀌었던 것 같다. 또 많은 협력업체들도 생겨났다.

내 기억에 부산화력에서도 수십 명의 보수부서 직원들이 강제퇴직(?)을 당하여 보수회사 직원이 되었는데 그 때 받은 퇴직금으로 괴정이나 하단에 주택을 마련하였는데 얼마 뒤 집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2018년 12월 태안화력에서 사고로 죽은 김용균 청년은 태안화력 협력업체인 한국발전기술에 소속된 파견근로자였다고 한다. 옛날처럼 한전 보수부서 직원이었다면 한전사장이 큰 질책을 당하였을 테고 만일 중대재해법이 있었다면 한전사장이 쇠고랑을 찼을 터인데 앞날을 내다보는 선지자적 혜안(?)을 가졌던 한전은 일찌감치 보수부서를 독립시키고 분리시켜 안전사고로 한전사장이 쇠고랑을 찰 수 있는 위험을 원천차단한 셈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마산화력에서 4개월간의 운전원 교육을 마친 다음 영월화력발전소로 배치받아 가 석탄미분기 운전원으로 교대근무를 시작하였다. 새까만 작업복, 수많은 도깨비 뿔을 달고 천둥처럼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석탄미분기(Coal Mill), 걸핏하면 막혀서 쇠망치로 두들겨야 했던 로콜피더(Raw Coal Feeder), 밟으면 풀썩풀썩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고운 석탄가루, 희미한 전등불 아래로 귀신이라도 나올 듯 하던 피씨벙커와 미분탄 디스트리뷰터(P. C. Bunker Distributer), 백열등 불빛 아래 피어오르던 석탄먼지와 유리솜 가루를 그대로 들이마셔야 했고, 분필가루인지 석고가루 같은 ‘신원-Z’라는 20 킬로그램짜리 포대를 뜯어 넣어야 했던...... 그리 위험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몸은 석탄먼지와 소음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셈이었다.

 

영월화력에서 근무할 때 나는 직접 사고를 당하거나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바로 한 해 전 대구공고 선배가 복수기 냉각수관 위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터빈이 과속으로 폭발한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보다도 영월화력 신화력을 건설하던 도중 몇 사람이 추락사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숙집 아주머니로부터 들었다. 그 아주머니도 그 때 건설현장에 나가서 청소나 치다꺼리 일을 하셨는데 사람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셨단다. 사람이 마치 지푸라기 떨어지듯 그렇게 바람에 날리면서 떨어지더란다.

 

이듬해 70년에 부산화력으로 전근한 내가 처음 받은 보직은 보일러보조운전원 2(ABO-2)였다. 보일러실에는 BO, ABO-1, ABO-2, 이렇게 세 사람이 근무했다. 보일러 운전원들에게 가장 큰 일과는 연료버너를 교체하는 일이었다. 보일러에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꽂혀 있는 여덟 개의 연료버너들은 길이가 3미터쯤 되고 무게도 5~60 킬로그램 정도는 나갔는데 이 버너를 교환할 때는 BO, ABO-1, ABO-2, 세 사람이 방독면을 쓰고 커다란 벙어리장갑 같은 석면장갑을 끼고 달라붙어 작업을 했다. 한 사람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 로프의 후크를 버너의 고리에 건다. 한 사람은 위에서 버너를 끌어올리고 두 사람은 아래에서 로프에 매달려 잡아당긴다. ‘영차, 어영차’, 버너가 잘 뽑혀 올라오기도 하지만 버너 주위에 제대로 연소되지 않은 기름이나 딱딱하게 굳은 재가 끼어 있을 때는 세 사람이 낑낑거리며 한참 용을 써야 했다. 버너가 뽑히면 그 순간 보일러 노 안으로부터 연소개스가 ‘슈욱-’ 뿜어져 나온다. 방독면을 안 쓰면 그걸 뒤집어쓰고 코로 들이마시게 된다.

 

드디어 버너를 뽑아내면 석면장갑을 끼고 뜨거운 버너를 붙잡아 조심조심 바닥에 뉘어놓고, 로프를 풀고,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새 버너를 로프에 걸어 끌어올려 보일러 속으로 다시 집어넣는다. 또 ‘슈욱-’ 연소가스가 뿜어져 나온다. 버너를 밀어 넣고 클램프를 도로 채우고 호스를 연결한 다음 연료밸브와 증기밸브를 연다.

그리고 교체된 뜨거운 버너를 들어 옮겨 세척작업대에 올려놓고 커다란 렌치로 버너끝, 버너팁(Burner Tip)을 풀어내어서 솔벤트 통에다 담가 두었다가 나중에 깨끗하게 닦아내고 새로 버너에 조립한다. 한 여름철에는 가만 앉아 있어도 열사우나같이 뜨거운 보일러실에서 석면장갑 끼고 방독면 뒤집어쓰고 버너교체 작업 두어 번 하고나면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그럴 때 파일론 계단의 문을 통하여 보일러실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보일러실은 항상 보일러에서 새나오는 연소가스, 아황산가스로 충만하였다. 보일러 꼭대기 굴뚝 바로 밑에 설치된 공기예열기 수트블로잉(Soot Blowing) 작업을 할 때는 아황산가스를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황산가스 속에서 살았다. 안전사고의 위험은 적었지만 그 대신 우리의 폐는 위험하고 나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ABO-2가 점검해야 하는 연료유 탱크와 연료유 이송펌프실은 발전소 뒷마당 주변압기 옆을 지나 한참 걸어가야 하는 꽤 먼 곳에 있었다. 여름 어느 날 내가 근무하는 시간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나는 비닐 비옷을 입고 연료탱크와 펌프를 점검하러 나갔다. 펌프실에 갔더니 펌프실 바로 앞에 도랑이 불어난 물로 넘쳐나 흙탕물이 펌프실입구로 밀려들고 있었다. 도랑에는 모래주머니가 쌓여 있었지만 불어나는 흙탕물을 막아내지 못 하고 있었다.

물이 펌프실로 밀려들면 펌프가 물에 잠기고 발전소가 정지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모래주머니를 붙잡고 버티기 시작하였다. 보일러실에 되돌아가 지원을 요청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사태가 너무 급한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러고 있다 보면 누가 또 오겠지.....

물은 급속히 불어났다. 발목까지 차오르던 물이 금방 무릎까지 차올라왔다. 여름철이었는데도 차가운 물에 손발이 시려오고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빗속에서 모래주머니를 붙잡고 덜덜 떨며 버티고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주임이 찾아왔다. 보일러실에서 내가 안 보이니까 찾아온 모양이었다. 주임은 허둥지둥 돌아갔고 좀 있으니 대여섯 명이 달려와서 동사직전의 나를 구조(?)해 내었다.

 

보일러 꼭대기 난간 끄트머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아찔 오금이 저려왔고, 저 아래 콘크리트 바닥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팔다리만 유난히 왔다갔다 움직이는 우스꽝스런 거미, 벌레 같은 모양으로 보였다. 여기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머리부터 떨어질까, 발부터 떨어질까? 아니면 등? 배? 뼈가 어느 정도 부스러질까? 몸뚱이가 터지고 머리통이 박살날까? 저 아래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몇 초가 걸릴까? 4초? 5초? 떨어지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콘크리트 바닥에 몸이 부서지는 순간의 느낌은 어떨까? 얼마나 아플까? 의식은 금방 사라지고 금방 죽게 될까?

보일러 꼭대기 난간 안쪽에 신발을 벗어놓고 운전기록지(Log Sheet)와 손전등을 그 옆에 나란히 놔두고 39.7미터 아래로 스무 살 꽃다운 나이의 몸을 던진 젊은 친구 이야기는 앞서 한 적이 있다. 영백이는 경찰이 와서 시신을 수습해 갈 때까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그 친구의 시신 옆에서 밤을 새웠다고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부산공전 출신이었던 세진이는 군대에 갔다가 6개월만인 71년 어느 날 의병제대(依病除隊)로 돌아왔다. 군대에서 정신병 증세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발전소준공단계에서 시운전중이던 69년말 쯤, 3호기 보일러실에서 제어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다 제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그레이팅이 쑥 빠지는 바람에 11미터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하였다고 한다. 떨어지는 도중에 공기덕트에 부딪히면서 속도가 줄어들어 목숨은 건졌지만 머리를 부딛혀 다쳤단다. 몇 달 동안 치료를 받고 회사에 출근하였지만 정상적으로 근무하지 못 하다가 마침 입영영장이 나오고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군대에 갔단다.

 

의병제대로 군에서 돌아온 그는 겉으로는 멀쩡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고 성품도 얌전했고 바둑도 잘 뒀고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회사에서는 그를 ABO-1으로 발령하였다. 그런데 가끔씩 문제를 일으켰다. 평소엔 멀쩡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려가서 밸브를 잠가버리는가 하면 잘 돌아가는 에어 컴프레서의 스위치를 내려서 꺼버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발전소가 정지되고 난리가 났다. 왜 그랬냐니까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기계가 부서져서 그랬단다. 몇 번 그런 문제를 일으키자 회사에서는 그를 1, 2호기 쪽으로 발령 내었다. 그래도 그런 돌발적 착란증세는 계속되었다. 결국 회사에서는 그에게 사표를 내도록 종용하였다. 1972년 어느 날 그는 회사를 떠났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다는데, 회사를 그만 두고도 한 동안 어머니와 함께 감천 동네에서 살았다는데 그 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추락사고 당시 그리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아 본사에 사고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고보고를 하면 사보에 실리고 사업소는 평가에서 감점이 되고 사업소장은 인사고과를 나쁘게 받게 되니까 웬만하면 사고보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상처리를 못 하고 회사에서 봐주는 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한 다음 얼마 후 군대에 갔는데 의병제대로 돌아와 복직하고 나니까 골치가 아팠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사고보고를 하려니 책임문제가 따르겠고, 사람은 자꾸만 이상증세를 보이고..... 결국 자진사퇴를 종용해서 회사를 떠나게 했다는 것이다. 세진이는, 그리고 그 홀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군대에서 돌아와 복직한 이듬해(1976년?)였던가 여름철, 정기점검보수작업을 하던 1,2호기 쪽에서 사고가 났다. 바닷물 냉각수 관로를 막아놓고 20여일이 지난 다음 네댓 사람의 보수과 직원들이 철사다리를 타고 관로 안을 점검하기 위하여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관로 아래 바닥에 내려가던 직원들이 한꺼번에 정신을 잃고 모두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관로내부에 붙어서 서식하던 따개비, 담치 같은 조개들이 죽어 썩어서 암모니아 가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그 중 한 사람이 재빨리 고압공기 호스를 끌고 와서 관로 아래로 공기를 분사해 넣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로프를 매고 내려가서 한 사람씩 끌어올렸다. 앰뷸런스를 불러 송도고개 위에 있는 복음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다들 다시 깨어났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끝내 깨어나지 못 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해에 있었던, 그 어려운 초급간부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계장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고 문병식씨는 젊은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놓고 그렇게 가버렸다. 회사에서는 그를 과장으로 추서하고 장례식을 하였는데 우리는 회사에서 내준 버스를 타고 부산시내를 통과하고 동래를 지나 기장 근방에 있는 공동묘지까지 따라가 그를 전송하였다. 그 공동묘지는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가서 동해 바다가 보이는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엔가, 이번에는 3,4호기 쪽에서 정기점검보수작업을 하다가 한 젊은 작업자가 추락사하는 일이 있었다. 해수냉각수펌프(CWP)는 높이가 10미터 가량 되는 기다란 수직펌프인데, 이걸 크레인으로 들어올려 꺼내 콘크리트 바닥에 세워놓고 비계목을 설치한 다음 케이싱에 다닥다닥 붙은 따개비와 담치 같은 해양생물을 떼어내는 작업을 하다가 그만 실족하여 추락한 것이다. 인근 동네에 사는 청년이었는데 작업을 위하여 임시채용된 인부라고 하였다.

 

내가 부산화력에서 일하면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AO(보조기기운전원)일 때 하던 수소탱크 교체작업이었다. 발전기는 증기터빈과 함께 초당 60회전의 어마어마한 고속으로 회전한다. 발전기는 거대한 철심에 감긴 코일 전자석이 맹렬하게 돌아가면서 전기를 일으키는데 고속회전에 따라 발전기 내부에 엄청난 열이 발생한다. 그래서 발전기 내부를 식혀주기 위하여 수소를 발전기 내부로 순환시켜 주어야 한다. 발전기 냉각에 공기나 질소가 아닌 수소를 사용하는 것은 기체 중에서 수소가 가장 밀도가 낮기 때문이다. 발전기가 회전기기이기 때문에 수소는 회전자축과 베어링 패킹 사이 틈새로 조금씩 새어나와 유출되기 때문에 수소를 보충해주어야 한다.

 

수소를 보충해주는 작은 배관이 발전소 건물 뒷부분 구석에 있었고 거기에 수소주입연결구(Manifold)와 고압수소병들이 있었다. 수소병은 우리가 흔히 보는 산업용 산소통이나 질소통, 탄산가스통과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인데 수소병이라고 구분하기 위하여 녹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고압수소병의 수소가 소진되면 수소병을 교체해 주는데 우리는 항상 두려움 속에 조심조심 작업을 해야 했다. 수소는 조그만 불꽃이나 스파크만으로도 폭발할 수 있고, 심지어 빗으로 머리를 빗을 때 발생하는 작은 정전기 스파크로도 폭발할 수 있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무거운 수소병을 굴리고 일으켜 세워서 주입구에 연결하고 밸브를 열어 “빡-” 소리를 내면서 수소병의 수소가 주입구로 들어가는 것조차 머리가 쭈뼛거릴 정도로 무서웠다. 한 번 울산에서 수소병 폭발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수소병 폭발로 시신이 산산조각 나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집게와 핀셋으로 철조망 울타리에 걸린 살점조각을 거두어 양동이에 담아 거두었다고 했다.

 

나의 입사 동기 중에서도 몇이 죽었다. 영월화력에 같이 근무했던 규성이는 변전소에서 근무하다가 감전사고로 죽었고, 여수화력으로 갔던 한 친구는 추락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죽었고, 성호는 사고는 아니었지만 신장염으로 죽었고, 부산화력 기숙사에서 술만 마시면 주사를 부리던 한 친구는 의문사를 하였고, 키 작은 이 계장님은 연수원에 교육 받으러 갔다가 친척집에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다. 신혼이었는데 젊은 아내를 남겨놓고 그렇게 떠나버렸다. 서해안 어느 화력발전소에서는 주증기관이 파열되어 한꺼번에 몇 사람이 찢어지고 푹 삶긴 시체로 변해버린 일도 있다.

 

나에게도 아슬아슬했던 일이 몇 번 있다. 한 번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엘리베이터가 문이 열린 채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불과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어떻게 사람이 초고속으로 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지금도 신기하다. 뛰어내려야 하느냐, 엘리베이터 안에 있어야 하느냐, 엘리베이터를 매단 와이어로프가 계속 감긴다면 엘리베이터는 꼭대기까지 올라간 다음 결국 추락할 게 아닌가 하는 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뛰어내려야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불과 1미터도 남지 않은 틈으로 몸을 날렸는데 하마터면 두 동강이 날 뻔 한 내 몸뚱이 등줄기에서 땀이 쭉 배어났다.

 

160기압, 540도, 부산화력 주증기의 압력과 온도이다. 과열증기는 증기(蒸氣)가 아니라 화기(火氣)다. 인슐레이션(Insulation: 파이프를 감싸는 보온재)이 벗겨진 파이프는 밤에 붉은 빛을 발한다. 발전소 보일러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낡은 밸브나 파이프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서 계기의 눈금을 읽으며 나는 만약 이 파이프가 터진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을 참 많이 했었다.

 

그 시절 그 험한 작업환경 속에서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것인 줄만 알고 일했다. 그 여러 해 동안 내가 먹고 마신 석탄가루, 유리솜 가루, 석면가루, 아황산가스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밤샘근무에 알루미늄 냄비에 라면을 끓여먹으며 국물과 함께 들이킨 알루미늄은 괜찮을까? 내가 그 때문에 지금 암에 걸린다면 산업재해라고 인정될 수 있을까?

산업재해는 필요악일까? 인간들의 삶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바쳐져야 하는 희생제물일까?

아직 이렇게 살아서 그 시절을 뒤돌아보고 있으니 하나님의 지켜주심이요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