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화력

29. 베니어 전기장판 사건

Thomas Lee 2022. 5. 20. 11:49

이 글을 쓰는 지금이 2022년 1월이니 내가 한시퇴직으로 한전을 떠난 지도 23년이 지났다. 한전이 지금도 이 사가(社歌)를 부르고 있나 모르겠다. 가사를 기억으로 적어보는데 맞는지도 모르겠다.

“백두산 줄기 따라 한라산까지 연연히 이어가는 귀한 동맥을

한 마음 한 뜻으로 가꾸어가는 우리는 횃불이다, 겨레의 등불

나가자, 한국전력 힘을 다 하여 어둠을 이겨내자, 광명의 역군“

 

한전 사가(社歌)의 가사(歌辭)는 전력 송전선을 ‘동맥’으로 표현하고 ‘횃불’과 ‘등불’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어둠을 이겨내는 광명의 역군’으로 한전의 역할을 나타내고 있다.

그랬다. “광명(光明), 그 시절 전기는 어두운 호롱불을 밝은 전등불로 바꾸는 광명이었다.

내가 입사하던 1969년 그 시절에도 각 가정들에는 아직 이렇다 할 전기용품도 가전제품도 없었고, 전기는 거의 전등을 켜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오늘날 전기요금 아끼려고 조명등을 애써 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노인네들이나 전기요금 아낀다고 전등을 끌 뿐이다. 그 시절엔 전기요금이 그렇게 비쌌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안동군 풍산면에서 살던 때를 제외하고는 초등학교 내내 산골짜기에서 컴컴한 호롱불 아래에서 살았다. 호롱불을 가까이 켜놓고 엎드려 책을 읽다가 머리카락을 ‘후르륵’ 태워먹은 적도 여러 번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안동시내로 나온 촌놈인 나는 비로소 밝은 전등불을 보았다. 우리 가족은 안동시 평화동 산비탈에 집을 얻어 살았는데 나는 밤이 되면 뒷산으로 올라가 안동시내를 반짝반짝 수놓은 아름다운 불빛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

 

우리 집에서는 전기요금을 아끼려고 벽에다 구멍을 뚫어 30와트짜리 전등 한 개를 달아가지고 두 방이 함께 썼다. 울타리 밖 변소에는 5 와트짜리 희미한 녹색 전등 한 개를 달아놓았다. 전기가 일반선과 특선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일반선은 해가 지는 시간에 들어왔다가 밤 열한시면 나갔다. 우리 집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소모하는 것은 언제나 틀어놓는 빨간 색 라디오 한 대와 어머니가 가끔 쓰는 다리미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삼촌이 우리 집에 왔다가 전깃줄을 살짝 벗기고 계량기를 지나 두꺼비집을 열고 바로 연결하는 선을 설치했다. 그렇게 해놓으니 계량기가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낮에는 그 전깃줄을 치워놓았다가 밤에 어두워지면 두꺼비집을 열고 전깃줄을 연결했다. 그런데 그렇게 전기요금을 아끼던 것도 잠시, 어느 날 전기회사 검침원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 전기원을 붙잡고 잘못 했다고 싹싹 빌어 큰 벌금은 물지 않았지만 다시는 그런 모험을 하지 않게 되었다. 전기도 많이 쓰지 않던 우리 집이 그렇게 해서 전기요금을 몇 푼 줄인다고 그랬을까?

 

아무튼 내가 안동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구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전에 입사하던 때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전기는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지 20년도 안 된 그 당시 우리나라의 가난한 형편, 우리나라 국민소득 수준에 비추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서민들이 달랑 30와트 전구 한 개 달아놓고 살던 시절, 그 시절에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력에 입사한 것이다.

 

내가 1969년 한전에 입사해서 쌍문동 연수원에서 신입사원교육을 받을 때, 교육과목 중 하나가 “천용방지”였다. ‘천용’이 뭐냐니까 ‘전기 도둑질, 즉 도전’을 점잖게 지칭하는 말이란다. ‘천용’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도 잊어버렸다. 擅用이던가.....?

아무튼 ‘천용방지’ 과목 시간에 강사는 배전 전력선에 바늘을 꽂아 전선을 이어 집안으로 연결하여 전기를 훔쳐 쓰고, 벽 틈새로 전선을 숨기고, 계량기 앞 쪽의 전력선을 까내고 전기선을 걸어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전선주로부터 한 선만을 몰래 따와서 땅에 어스를 시켜 전등을 켜는 등의 다양한 도전수법을 소개하고 도전을 찾아서 적발하는 방법과 사례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한전 직원이 천용을 적발하면 적발된 수용가에 부과되는 벌과금의 3분의 1인가, 절반인가를 포상금으로 준다고 했다.

 

지금은 송배전손실률이 4% 정도에 그치지만 그 때 한국전력의 송배전 손실률은 무려 20 % 가량 되었다고 기억된다. 전력의 10% 이상을 도적질, 아니 천용 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무튼 그 시절엔 전기가 그렇게 비쌌고 가난한 서민들에게 전등을 켜는 전기요금조차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창피스러운 일이지만 1970년엔가 71년엔가 부산화력 사택에서 한 계장님이 몰래 천용을 하다가 걸려서 옷을 벗고 회사를 나가는 일도 있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여 복직한 그 해 1975년 말 1976년 초 겨울은 몹시 추웠다. 달리 추웠던 게 아니라 합숙소의 보일러설비가 고장나서 난방스팀이 몇 주일이나 공급되지 않았다. 합숙소 전체가 냉동고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추위를 견디려고 이불을 겹겹이 뒤집어쓰고 100와트짜리 백열등을 켜서 수건에 둘둘 말아 발밑에 넣거나 품안에 끌어안고 자는 등 별 짓을 다 했다. 참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다가 한 전기과 직원이 값싸게 전기장판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그 직원이 가르쳐준 대로 시장에 가서 베니어판 한 장을 사 와서 거기다 조그만 못을 양편에 촘촘히 박고 거기에다 80미터에서 100미터 정도 길이의 가느다란 에나멜선을 지그재그로 감아서 베니어판에 깔았다. 그리고 종이에 풀칠을 해서 그 위를 덮어 붙여서 말렸다. 스위치도 달고 온도조절기도 사다 달았다. 이렇게 전기장판을 만드는데 비용이 500원도 안 들었다. 에나멜전선이 끊어지면 칼로 에나멜을 벗기고 이어 붙였다. 에나멜선이 길면 열이 덜 나고 짧으면 열이 많이 나서 선이 쉽게 끊어진다는 것도 그 때 배웠다. 그렇게 우리는 베니어 전기장판을 만들어서 그 추위를 견뎠다.

 

그 다음에 문제가 터졌다. 우리 100명 가까운 합숙소 직원들에게 일인당 석 달 봉급이나 되는 무려 8만 몇 천원 씩의 전기요금이 벼락같이 부과된 것이다. 일인당 사용전력량이 겨우 120 KWH밖에 안 되었는데도 그 120 KWH에 8만원 넘게 전력요금이 부과된 것은 무지막지한 누진제 때문이었다. 100여명이 입주한 합숙소가 전력량계가 하나 달랑 달려 있는 1가구로 되어 있어서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 정상요금의 열 배, 스무 배나 되는 엄청난 누진요금이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 달 봉급이 3만원인데 한 달 전기요금 8만원을 내라고? 이게 말이 되는 거야?” 항의를 하고 고성이 오갔지만 결국 전기요금을 6개월간인가 분할납부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 6개월 동안 우리는 월급의 절반을 전기요금으로 공제당하고 가난과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회사는 뒤늦게 전기공사를 하고 각방마다 하나씩 계량기를 달아주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부산지사 나쁜 친구들, 뒤늦게라도 다가구(多家口)로 인정해서 요금을 조정할 일이지, 같은 한전식구들에게 이렇게 누진요금 바가지를 씌워 석 달 치 봉급을 뺏어 가다니, 지금 생각해도 용서가 안 된다. 회사도 그렇다. 합숙소 보일러가 고장 나서 발생한 일에 아무 책임도 안 지다니, 그리고 100여명 가까운 합숙소에 계량기 달랑 한 개를 달아놓고 1가구로 해 놓다니, 이런 멍청한 짓을 해놓은 인간은 누구였는지....., 또 그렇다. 전기 120 KWH, 8만원어치로 따뜻하게 지내기라도 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추워서 덜덜 떤 거 생각하면, 그러고도 8만원 넘는 전기요금 바가지 쓴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진다.

 

앞으로 돌아가서......, 내가 1969년에 한전에 입사하여 수습기간이 끝난 다음 영월화력에서 받은 월급이 2만 4천원 정도였다. 2만 4천원이 어느 정도였을까?

우리 알다시피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던 그 해 한국의 연간국민소득이 80 달러쯤 되었나 그랬다. 내가 당시의 환율을 기억할 수는 없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이던 1962년, 아버지께서 읽으시던 신문의 고바우 만화에 코가 큰 미국사람은 커다란 잔을 들고 한국 사람은 조그만 소줏잔을 들고 건배를 나누는 그림과 함께 1,300 : 1이라는 숫자가 써져 있었던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 때 내가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아버지에게 여쭈어봤던 것 같다. 아버지가 설명해 주셨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1,300 : 1은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이 맞다면 그 때 환율이 1 달러 당 1,300 환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해 1962년 6월엔가 있었던 화폐개혁이 10 : 1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환율은 130 : 1이 되었고 이로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조금씩 원화가 평가절하 되어갔던 것 같다.

 

내가 입사하던 1969년쯤에는 국민소득이 210 달러, 환율이 300 : 1 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정확히는 모르겠다. 아무튼 69년 신입사원이던 내 봉급 2만 4천원을 300 : 1로 나누어 달러로 환산하면 나는 80달러 정도의 월급을 받은 셈이다. 아니다, 석 달에 한 번씩 상여금 15,000원 가량을 받았으니까 이걸 합치면 한 달에 2만 9천원. 그러니까 월급 96달러 정도 받은 셈이고, 1년 34만 8천원, 달러로 치면 연봉 1,160 달러 정도를 받은 셈이니 국민소득 210 달러의 다섯 배가 넘는 고소득 봉급자였던 셈이다, 나이 열아홉 살에 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당시 한국에서 봉급이 가장 많다던 한전이었지만 국제기준으로 보면 아직 한참 뒤떨어진 가난한 빈국의 근로자 봉급이었다. 월급으로 치면 96 달러, 주급으로 치면 22 달러, 일당으로 치면 4 달러 40센트, 시급(時給)으로 치면 시간당 55센트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 아프리카의 빈국에서는 아직도 하루 일당이 4~5달러에 불과하다는데 그 때 우리 한전의 봉급이 그 수준이었던 셈이다. 물론 화폐가치는 다르겠지만......

 

그러니 다른 봉급생활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해, 그러니까 1967년에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감이셨는데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사직서를 내고 퇴직금 24만원인가를 받아서 약국을 차리셨다는 이야기를 앞서 한 것 같다. 그 때 교감 선생님이던 아버지가 받으시던 월급이 7~8천원인가, 만원이 안 되었다. 열아홉 살 때 내가 받은 한전봉급의 3분의 1수준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아버지 말고도 당시 월급 10,000원도 안 되던 수많은 선생님들이나 공무원들이나 영월화력에서 석탄과 재(灰) 치는 일을 하면서 하루에 300원 일당, 한 달에 6,900원, 7,200원 씩 받아서 살아가던 일용직 근로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랬다. 순경이 생활고로 자살했다는 뉴스가 나기도 했던 그 때였다. 지금 이 세대는 그 때를 기억하지 못 할지라도 내가 한전에 입사하던 1969년, 그 때는 아직도 대한민국이 그렇게 가난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그 당시 그런 우리에게 아직 전기는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던가.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던 때 국민소득은 80 달러도 못 되었고 전력3사가 보유한 전국의 모든 발전소를 몽땅 합쳐도 그 용량이 지금의 대형 화력발전소 1기 용량에도 못 미치는 36만 킬로와트였다. 그렇다. 겨우 36만 킬로와트였다!

당시 발전소라야 6.25 때 중공군을 쳐부수고 탈환한 화천수력 12만 킬로와트, 영월화력 10만 킬로와트, 당인리화력 2만 5천 킬로와트, 부산항 발전함 레지스탕스호 3만 킬로와트, 이게 거의 전부였던 것이다. 남한의 발전설비를 다 합쳐야 겨우 36만 킬로와트인데 전력회사는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3개나 되었다. 그리고 영월화력발전소에서 내가 처음 보았던 광경, 겨우 20만 킬로와트 발전소에 600여명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일하던 광경을 생각해 보라. 그 영세성을 생각해 보라. 그러니 전기가 어떻게 비싸고 귀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전력이 바로 국가경제의 핵심동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5.16 군사혁명에 성공하자 군사정부는 전력삼사 통합을 전광석화처럼 해 치웠고, 불과 한 달 반 뒤인 1961년 7월 1일 한국전력주식회사를 국영기업으로 출발시켰다. 전원개발특례법과 토지수용법을 만들고 해외차관을 어떻게든 들여와 발전소를 건설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돈도 없고 전력설비도 워낙 영세한 터라 대용량 발전소 건설은 아예 불가능했다. 그러나 당인리, 마산, 삼척 등에 2만 5천 킬로와트짜리 조그만 화력발전소들을 하나하나씩 세우고 춘천, 의암, 팔당에 댐을 막고, 남강수력, 괴산수력 같은 조그만 수력발전소와 왕십리내연 같은 디젤발전기까지 부지런히 만들고, 조금씩 발전소 규모도 늘여서 60년대 후반에는 영월에 5만 킬로와트짜리 2기, 부산에 6만 6천 킬로와트짜리 2기, 군산에 7만 킬로와트짜리 발전소...... 이런 식으로 발전소들을 세워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입사하던 1968년말에는 총발전설비가 163만 7천 킬로와트에 이르렀던 것이다. 5.16 군사혁명불과 8년 만에 36만 킬로와트가 163만 7천 킬로와트로 너 댓 배로 늘어났으니 얼마나 전력설비 건설에 노력했단 말일까?

그러니 어떻게 전기가 귀하지 않고 전기요금이 비싸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1969년에도 아직 국민소득이 210 달러에 불과하였고 시골에서는 아직도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호롱불을 켜고 살고 있었다.

 

내가 영월화력에서 부산화력으로 내려간 바로 그 때, 그러니까 70년 여름, 7월 1일이었던가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428 킬로미터에 총공사비 450억원.

그리고 이어서 고리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이 보도되었다.

“수풍수력 60만 킬로와트에 필적하는 55만 킬로와트 원자력발전소, 고리에 건설된다.”

“총공사비 550억원, 단군이래 최대의 공사”

내가 기억하는 1970년 당시의 보도다.

 

박정희 대통령의 고리원자력 1호기 건설은 참 무모에 가까우리만큼 과감한 정책결정이고 시도였다. 전국의 전력계통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발전소 한 개가 20% 이상을 커버하는 대용량이면 곤란하다. 그 발전소 하나가 정지되면 전국의 모든 전력계통이 그 충격으로 모조리 정지되어 전국 블랙아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 전체발전설비용량이 200만 킬로와트 밖에 안 되는데 55만 킬로와트의 원전을 짓는다는 것은 무리에 가까웠다.

무리는 전력계통문제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건설에 필요한 재원, 금융이 더 문제였다. 한국전력이 겨우 200만 킬로와트 밖에 안 되는 전력설비로 전기장사를 해서 올리는 한 해 순이익이 기껏 백억 원, 백 몇 십억 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내가 입사할 때 배운 기억으로 1968년에 한국전력이 올린 영업이익은 겨우 74억 원이었다.)

 

고리 1호기 계약자인 웨스팅하우스를 앞세워 미국에서 IBRD 차관과 상업차관을 빌려온다지만 그것만으로 건설재원을 다 충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백열등을 나누어주면서 팔아오라고 했다. 백열등을 보급해서 전력판매량을 조금이라도 늘여보겠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회사채를 발행하고 직원들에게도 회사채를 떠안겼다. 나도 한 달 봉급이 넘는 3년 만기 회사채 3만원을 떠맡아야 했다. 한 해 이자가 25%라고 했다. 이걸 복리로 굴리면 3년 뒤에는 10만원쯤 된다고도 했다. 나는 군대에서 제대한 다음 그 사채를 들고 충무동 대학병원 앞에 있는 경남지사로 가서 돈을 찾았다. 담당직원은 이자 75%를 더 해서 오만 이천원인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왜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했더니 매년 이자를 찾아서 은행에 맡겼더라면 복리이자로 더 불었을 텐데 나는 3년 동안 가만히 놔두었기 때문에 그렇단다. 속은 기분이었다.

 

고리 1호기는 그렇게 건설되었다. 그 시절, 나도, 회사도, 나라도 다 가난하던 그 시절, 한국전력인들 돈이 어디 있겠나마는 그 가난을 이기고 마침내 고리 1호기는 1978년 4월, 총공사비 1,280억원으로, 설비용량 58만 7천 킬로와트로 준공되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 해 1978년 단 한 해 동안 한전이 올린 영업이익 600억원의 절반인 300억원을 고리원자력 1호기가 벌어다 주었다.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복귀한 1775년 말, 그 때는 아직 고리원자력은 건설중이었다. 그리고 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드는 일을 하던 나는 합숙소에서 추위에 떨다가 베니어 전기장판으로 120 킬로와트아워의 전기를 쓴 대가로 석 달 봉급에 달하는 8만원을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년 뒤, 나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요원이 되어 영광원자력 1,2호기 건설현장에 있었고, 80년대 들어 고리 2호기, 월성 1호기, 고리 3,4호기, 영광 1,2호기, 울진 1,2호기..... 이렇게 원전들이 준공되어나가자 80년 무렵부터 90년 무렵까지 전력요금이 거꾸로 내려가서 세계에서 가장 값싼 나라가 되었다.

아,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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