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이야기한 대로 1979년, 한전 본사는 비좁은 을지로 사옥을 떠나 여의도로 이사하였고 우리 원자력건설부도 퇴계로에서 여의도 KBS맞은편 전경련 빌딩으로 이사하였다. 나는 잠실에서 통근버스를 타고 여의도로 출퇴근하였는데 통근버스를 놓치면 택시나 버스, 또는 지하철로 영등포를 거쳐서 여의도로 출근하였고 퇴근할 때는 영등포로 나와 천호동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천호동에서 출발하여 잠실을 거쳐 여의도로 가는 통근버스는 강변도로(올림픽대로)를 달렸으므로 우리는 버스 안에서 아침의 한강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우리 어린 시절에 듣기로는 겨울에 한강이 두껍게 얼어붙어서 멋진 스케이트장이 된다고 했는데 그 때에는 한겨울에도 한강이 거의 얼지를 않았다. 성수동을 끼고 옥수동 쪽 한강으로 흘러들어오는 청계천은 한강을 시꺼멓게 물들이고 있었고 한강 물은 얼마나 오염이 심했던지 영하 20도 쯤이나 되어야 약간 얼었다가 영하 10도 쯤이면 도로 녹아버렸다.
퇴근할 때는 통근버스가 여의도에서 마포 쪽으로 건너 강북강변도로를 타고 달려서 성수대교를 건너 압구정동을 거쳐 잠실로 운행하였다.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있던 어느 날 퇴근버스를 타고 강북강변도로를 달려 성수대교를 건널 때, 아, 나는 지금도 뇌리에 선명한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았다. 태풍전야라 그런지 평소에는 스모그로 뒤덮이던 서울하늘이 맑고 깨끗하게 개였고 구름조각들이 온통 노을로 타오르고 남산타워는 붉게 물든 저녁노을 속에 우뚝 선 채 한강 위로 비추이면서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핏빛처럼 1979년 가을은 부마사태와 궁정동 총성, 12.12 사태 등 숨 가쁜 역사적 사건들로 물들었고 그런 가운데 나는 고리 1호기 복수탈염설비 증설공사를 12월 31일, 목표일에 딱 맞추어 계약체결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였다.
1980년 봄....., 18년의 장기집권 끝에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어 서거하신 다음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등 박정희 대통령 시해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고,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이끄는 신군부가 계엄령의 서슬 퍼런 국정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고, 모든 결사와 시위, 모임, 동문회나 동호회, 심지어는 세 사람 이상 모이는 것조차 금지한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런데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 어느 날 대구공고 동문회가 전경련 빌딩에서 열렸다. 전두환 장군이 대구공고 출신이라 하여 대구공고만 예외적으로 동문회를 개최한 모양이었다. 대구공고 출신인 나도 1층 강당으로 내려가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중앙에는 ‘경축 대구공고 동문회’, ‘전두환 장군의 국보위 상임위원장 취임을 축하합니다.’, 같은 내용의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고 한 쪽 벽에는 ‘모교 대구공고 축구팀 부활을 응원하는 후원금 모금’이라고 쓴 하는 플래카드가 붙었고 그 아래 누가 얼마를 기부했다는 종이들이 죽 붙어 있었다. 종이 크기들이 기부액수에 따라 달랐다. ‘아무개 150만원’, ‘아무개 100만원’은 큰 전지 싸이즈로, ‘아무개 50만원, 30만원’은 반지 싸이즈, 10만원이나 5만 원짜리는 8절지, 만 원짜리는 조그만 A4 싸이즈 식으로 붙여 놓았다. 전두환 장군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하는 것 같더니 결국 전두환 장군은 오지 않았다. 권력자 한 사람의 힘이 이렇게 큰 것인지, 그 권력자에게 잘 보여서 덕을 보고자 하는 군상들의 모습이 이런 것인지, 씁쓸하였다. 나는 그 뒤로 대구공고 동문회에 다시 나가지 않았다.
전경련 빌딩에서 근무할 때 또 한 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다. 조선일보였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1910년 한일합방 직후 런던에서 순국한 이한응(李漢應) 열사의 발자취를 찾아 쓴 르포기사를 읽은 일이었다. 이한응 선생은 나와 같은 전의이가(全義李家)로 나의 이름은 그 분의 이름을 뒤집으면 똑같다. 그러니 내게 먼 형님뻘 되시는 분이다. 젊은 나이에 영국 공사로 파견되어 일본의 한국침탈을 고발하고 나라를 지키려고 애쓰다가 한일합방이 있은 후 자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기사는 당시의 행적과 상황을 추적해보면 자결이 아니라 일본의 밀정에게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던 것 같다. 영국 공사로 나갈 때 29세인가의 젊은 나이였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영어를 구사하였는지 영국정부에 보낸 영문편지는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필체로 써져 있었다. 전경련빌딩 지하층 휴게실에서 이한응 열사의 처절한 마지막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나의 가슴은 일본의 침탈 앞에 스러져간 힘없는 나라의 수많은 젊은 목숨들 생각에 서늘한 분노와 슬픔으로 저려왔다.
우리는 전경련 빌딩에서 본사 건물 사이를 자주 오갔다, 직원식당에 점심식사를 하러, 그리고 때로는 결재서류를 들고, 때로는 회의참석을 하러 여의도광장 남쪽 길을 따라 오가야 했는데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본사건물 앞에는 골프연습장이 있었는데 더러 골프공이 그물 사이를 뚫고 길가로 나와 있기도 하였다. 그 조그만 골프공이 무척 비싸다고 했다. 점심시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골프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골프가 뭔지 전혀 모르는 나에게는 사람들이 큰 그물망 안에 한 줄로 늘어서서 무슨 막대기 같은 걸로 조그만 공을 쳐서 날려 보내는 모습이 딴 나라의 신기한 별천지 광경이었다.
그 무렵 어느 날 본사 회의실에서 고속증식로를 소개하는 강의가 있다고 해서 참석하였다. 고속증식로를 영어로 Fast Breeder라 한다고 했다. 그 소개강의를 주최한 회사가 어느 미국회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원자로에서 우라늄이 핵분열하면서 생기는 플루토늄을 계속 이용하기 때문에 핵연료를 수 십 배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에 윈드밀(Wind Mill)인가 하는 세계최초의 고속증식로가 건설되고 있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40년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금방이라도 원자력발전의 획기적인 혁명을 가져올 것처럼 떠들던 그 고속증식로는 실용화되지 못 하고 있다. 일본이 고속증식로의 세계선두주자가 되겠다고 프랑스로부터 수 백 톤인지 얼마인지의 플루토늄을 사와서 몬쥬에 고속증식로 건설을 야심차게 추진했는데 소듐응결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이를 해결하지 못 하고 2000년대 들어 결국 손들고 말았다. 어쩌면 고속증식로를 핑계로 핵폭탄 수 천 개를 만들고도 남을 플루토늄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치밀한 꿍꿍이 속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수소핵융합으로 에너지를 무한정 얻어내는 꿈의 핵융합로가 연구되고 있지만 그게 언제나 이루어질지, 어쩌면 영영 꿈으로 끝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과연 인간의 기술능력으로 섭씨 1억 도를 정복할 수 있을까?
또 79년 봄에 있었던 드리마일 원전(Three Mile Island Nuclear) 사고로 인하여 미국 USNRC가 많은 추가보완사항들을 건설중인 한국의 원전에도 적용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원자력건설부에도 TMI 전담팀이 생겼던 것도 기억난다.
1980년 봄이 되자 국가의 안보위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시행되는 군부통치도 머지않아 마무리되고 바야흐로 민주주의의 봄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이른 바 3김씨가 대통령 선거에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사람들 사이에 퍼졌던 것 같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식견이나 능력, 덕망이 부족한 일개군인이 직접 출마하기 보다는 모 대학 모 교수를 내세울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봄은 오지 않았고 5월 어느 날 우리는 광주에서 엄청난 소요사태와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교통과 통신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고 TV에서는 연일 유언비어, 폭도, 계엄, 공수부대 같은 살벌한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광주사태가 진압된 지 몇 달 안 되어 전두환 장군은 통일주체회의 대의원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 수 천 명을 잠실체육관에 모아놓고 거기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곧이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80년 12월쯤엔가 그 동안 없었던 초급간부임용고시가 드디어 시행되었다. 이번에는 놓칠 수 없었다. 서울지역의 시험 장소는 마포에 있는 한 고등학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원자력직군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합격자 발표는 사내방송으로 스피커를 통하여 나왔는데 직군별 성적순으로 합격자 이름이 호명되었다. 원자력직군 합격자에 내 이름이 맨 먼저 나오자 옆 부서의 한 친구가 그랬다. “아니 이형, 망치도 아니고 톱을 해버렸네?”
나는 81년 초에 계장발령을 받았고 기전공사과를 떠나 공사3과에 첫 계장보직을 받았다. 입사한 지 12년이 지난 때였다. 그리고 그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한전은 다시 여의도를 떠나 강남구 청담동, 경기고등학교 영동대로 건너편 한라빌딩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 해 봄 아내는 두 번째 출산으로 딸을 낳았다.
공사3과는 원자력 7,8호기, 그러니까 훗날 영광원자력 1,2호기로, 다시 한빛 1,2호기로 이름이 바뀐 원전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프로젝트 담당차장(Project Manager, PM)은 웨스팅하우스사가 있는 미국 피츠버그 사무실에 파견되었다가 귀임한 고 김종석 차장님이었다. 그 해 81년 가을, 원자력 7,8호기는 전남 영광군 홍농읍 계마리 517번지, 건설현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참석 하에 기공식을 하였고, 나는 본사에서 군대에서 익힌 챠트 작성솜씨를 발휘하여 기공식장에 붙일 현황표와 도표를 만들어 건설현장으로 보냈다.
한 차례 살벌한 감원바람이 분 것도 그 해였던 것 같다. 부서별로 감원인원이 강제할당 되었고 부서장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 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내야 했고 이름이 적힌 사람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런 와중에 원자력 7,8호기 해외훈련요원 선발을 한다고 했다. 나는 기계건설 훈련요원으로 응시하였다. 건설요원선발에 응시한 사람들은 광화문을 지나 내자동 어디엔가 무슨 영어교육기관에 가서 LATT라는 이름의 시험을 보았는데 나도 합격하였다. 시험관이 개별적으로 오늘 여기 올 때 뭘 타고 어떻게 왔느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 같은 간단한 질문을 영어로 해서 기초적 회화가 가능한지를 테스트하고 나서 필기시험을 보았다. 필기시험은 열 다섯 문항 쯤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Oval을 그려라”였다.
Oval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나는 잠깐 당황스러웠다. “Oval이 뭐지? 삼각형, 사각형은 아니고, 원이라면 circle이라고 했을 테니 이건 기다란 동그라미 같은 거겠구나.”
나는 동그라미도 아니고 타원도 아니고 어정쩡한 감자 같이 그려서 답안지를 제출하였는데 그 못난 감자그림 덕분에 합격했지 싶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신원조회에서 6.25 때 백부님이 인민군의 탄약을 운반하는 부역행위를 했다는 것과 삼촌 한 분이 행방불명인지 월북을 했다는 이유로 연좌제에 걸려 해외여행을 못 한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원자력건설부장님(이종훈씨)이 보증을 해 주셔서 겨우 통과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선발된 원자력 7,8호기 건설 해외훈련요원은 토목, 건축, 기계, 전기, 계측 등 기술분야와 사무, 건설행정, 자재관리, 구매 등 사무분야를 합하여 30여명 되었던 것 같다.
해외훈련요원으로 선발된 우리는 단체로 광화문에 있는 무슨 기관에 가서 안보교육을 받았다. 해외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라던가, 여행국가의 정보를 수집하여 귀국보고서를 작성하라든가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981년 11월 하순, 우리는 드디어 각 분야별로 6개월에서 1년 사이의 기간 동안 벡텔(Bechtel)사에서 훈련 받기 위하여 김포공항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겐 비행기도 난생 처음이었고 해외여행도 난생 처음이었다. 부모님과 백부님, 숙부님, 동생들과 사촌들까지 열 명이 넘는 대규모 환송단이 서울로 올라와 김포공항에까지 따라와서 환송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아내와 네 살짜리 아들, 그리고 갓난아기인 딸을 놔두고 10개월 과정의 해외훈련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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