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3월, 공고졸업 10년 만에 대학을 마친 나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사장님은 김영준씨였고 원자력건설부장은 이종훈씨였다. 사실 나는 서울로 올라갈 처지가 전혀 안 되는 상황에 있었다. 서울 본사로 간다고 서울에 사택이 있거나 주택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우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달랑 전세금 80만원 들고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그 무서운 서울로 올라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일가족 집단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인 무모한 행보였다.
잠깐 그 당시 내가 받던 한전의 봉급수준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군대에 가기 전에 받던 월급은 대략 2만 5천원이었다.
군에 있을 때 우리 정보작전과장 대위의 봉급이 2만원도 안 되다가 대폭 인상되어 3만원이 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속으로 그랬다. “내가 제대하여 회사로 돌아가면 당신 보다는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제대해보니 내 봉급은 별반 오르지 않았다. 그 대위 봉급이나 비슷했다. 학생들 사표 내라고 호통 쳐서 나를 군대에 보낸 그 김상복 사장님이 3년 동안 봉급을 동결했다는 것이었다. 물가가 해마다 30% 가량이나 오르던 그 때 3년 동안 봉급을 동결했으니 봉급이 반 토막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70년대 초중반 당시 한전의 전체발전설비용량이 200만 킬로와트를 조금 넘어서는 정도였고 한 해 영업이익이 기껏 백억원, 2백억원이었는데 무려 550억원 규모(준공 때는 1,280억원으로 늘어났다.)의 고리 1호기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으니 회사의 재정상황이 어떠했겠는가? 앞서 이야기한대로 회사는 직원들에게 백열등을 나눠주면서 팔아오라고 했고 연리 25%짜리 회사채를 강매해야 했을 정도니....
77년엔가 78년에 수출총액이 10억 달러를 넘고 국민소득이 1,000 달러를 넘게 되었을 무렵부터 “5인가족 최저생계비”라는 단어가 등장하였고 그 '5인가족 최저생계비'는 나의 봉급수준을 훨씬 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봉급을 더 이상 억눌러 놓을 수 없었던 회사는 조금씩 봉급을 인상하기 시작하였고 1978년 고리 1호기가 준공되어 이익금이 대폭 늘어나자 봉급을 좀 더 올려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 79년초 내 봉급은 17만원 정도로 뒤늦게 대폭(?) 올랐지만 여전히 5인가족 최저생계비에는 미달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한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봉급이 가장 많은 한전"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때 본사 원자력건설부로 올라가게 되었다. 회사는 당시 원자력 직군 인력확보를 위하여 대학의 원자력전공 졸업자를 이끌어오고 원자력부서에서 일한 기간이 2년 이상 되면 급여의 25 % 가량이나 되는 원자력수당을 지급하고 있었으나 입사한 지 10년이 넘도록 화력발전소에서 일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발전소 교대근무하면서 받던 교대근무수당이 없어지는 바람에 부산화력에서 받던 17만원 받던 월급이 14만원으로 줄어들어 감봉처분, 강등처분을 받은 셈이 되었고 원자력 3년차 신입사원의 봉급과 비슷하게 되고 말았다.
더 큰일은 주거문제였다. 전세금 80만원으로 서울바닥 어디에 가서 전세방을 구한단 말인가? 알고 보니 많은 직원들이 서울 변두리에서 통근버스를 타거나 콩나물시루 같은 시내버스를 타고 출퇴근하고 있었다. 구세주는 부모님이었다. 약국경영으로 형편이 다소 나아진 고향의 아버지는 잠실에 아파트를 얻으라고 300만원 가까운 전세후원금(?)을 지원해 주셨고 우리는 330만원인가를 주고 잠실 1단지 아파트 5층 13평짜리 연탄아파트를 얻었다. 내 기억에 92동 504호였던 것 같다. 13평 아파트는 연탄아궁이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한 쪽에는 부엌과 조그만 베란다와 연탄광, 다른 한쪽에는 출입문 현관이 붙어 있었다. 물론 엘리베이터 같은 것은 없었고 5층까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세 살배기 철모르는 아들 녀석은 창에 매달려 집안의 물건을 창밖으로 던지고는 그게 땅에 떨어지는 걸 보면서 좋아라 깔깔댔다. 얼마 후 아버지께서 와보시고는 어린 손자가 아파트 5층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걸 못 보시겠다며 50만원을 추가출자(?) 하여 380만원으로 아파트 2단지 2층으로 우리를 옮겨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잠실 13평 아파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때는 잠실 아파트 투기바람이 한 바탕 불고 지나간 다음이었고 잠실 13평 아파트 거래가격은 850만원 가량이나 되었다. 지금 보기엔 그까짓 850만원도 없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 월급 14만원으로 살아가야 했던 우리 가족에게 850만원 아파트는 언감생심, 꿈이었다. 우리는 잠실에 살면서 해마다 오르는 전세금에 쫓겨 이리저리 옮겨 다닌 끝에 1단지, 2단지, 3단지를 거쳐 82년에는 시영아파트 13평으로까지 흘러갔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몰랐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아내로부터 들었다. 우리가 2단지에 살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아내에게 아파트를 사려면 얼마나 있어야 하느냐고 물으셨고 아내가 13평 아파트 시세가 850만원에서 900만원 쯤 된다고 대답하였고 아버지는 안동으로 내려가셔서 500만원의 거금을 보내주셨단다. 그래서 그 돈으로 아파트를 사려고 알아보려는 참에 어머니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단다.
"얘야, 그 돈 아직 가지고 있냐?"
"예, 어머님."
"아무래도 안 되겠다. 향이가 시집가는데 그 돈을 좀 써야겠다. 나중에 다시 보내주마."
그래서 아내는 그 돈을 도로 어머니께로 부쳐 드렸단다. 그렇게 우리집은 신기루처럼 왔다가 날아가 버렸다.
그 후로 잠실동네 아파트 시세는 해마다 고속성장을 거듭하여 몇 년만에 2,000만원 가까이로 올라섰고, 우리 가족은 전세금 400만원 가지고 잠실아파트 2단지, 1단지, 3단지, 그리고 시영 아파트까지 13평짜리로만 찾아 쫓겨 다니며 5년을 살았다.
그야말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자식새끼 유치원, 태권도장 안 보내고 모아서 전세금 올려주고, 그나마 전세금을 못 쫓아가서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처량한 봉급생활자였던 것이다.
우리 가족도 전세 아파트에 살았지만 회사도 그랬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본사는 여전히 을지로 입구에 있었는데 인원이 늘어나 많은 부서들이 인근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원자력건설부와 원자력발전부는 퇴계로에 빌딩을 얻어 들어가 있었고 수화력발전부서들은 시청 앞 코리아나 빌딩에 입주해 있었다. 또 그 해 1979년 가을 본사는 여의도에 건물을 구해 이사를 하였고 원자력부서들은 여의도 KBS 맞은 편 전경련 빌딩 여섯 층을 빌려서 입주하였다. 한전은 그 후에도 전세와 월세살이를 계속하였고 나중에는 청담동 경기고등학교 건너편 한라빌딩에 입주해 있다가 87년 무렵엔가 박정기 사장님 시절에 삼성동 167번지에 사옥을 짓고 회사는 비로소 셋방살이를 면할 수가 있었다.
회사는 번듯한 본사 사옥을 마련했지만 나는 그 사옥에서 날마다 밤늦도록 일해야 했고 우리 가족은 참 오랫동안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지 못 한 채 부평초처럼 떠돌며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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