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광 1,2호기 건설현장

49.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Thomas Lee 2022. 8. 17. 08:21

원자력발전소가 어떻게 건설되는 것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기초과학부터 첨단기술까지, 토목공사로부터 정밀기계와 컴퓨터까지 포함하며, 과학기술 뿐 아니라 금융, 법률, 상거래, 사무, 인력관리 등, 모든 경영분야를 망라하는 기술과 자본, 인력의 총력전이며 거대하고 치밀한 경영매카니즘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자력건설에 종사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한국인들은 자기분야의 일은 잘 한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프로젝트는 어렵다. 단독으로는 뛰어난데 협업은 약한 것이 한국인들이 아닌가 싶다. 삼성전자가 반도체와 핸드폰 분야에서 세계정상급 수준에 있지만 발전소를 구상하고 설계하고 복잡한 설비를 만들고 프로젝트를 해낸 것은 서양인들이다. 증기기관차부터 시작하여 비행기, 기선, 자동차, 컴퓨터 등 모든 것이 서양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누가 핵분열을 이용하여 물을 데워서 물을 가열하여 증기를 만들어 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만들어내는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고 시도를 했을까? 거대한 조직의 다양한 업무형태와 기능, 온갖 분야의 기술의 집적, 엄청난 자금과 물량, 인력의 동원,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금세기까지 인류가 쌓아온 기술과 경험의 집결체와도 같은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운영을 누가 구상하고 설계하고 이끌었을까?

 

원자력의 베테랑 기술인이라 하여도 원자력건설 전체를 다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 분야 수천수만의 인원이 동원되어 십 년 세월에 걸려 추진되는 지식과 경험과 노력과 시간의 결정이 원자력발전소이다. 전원계획에서부터 원자력건설계획, 부지선정과 지질조사, 과거 백만 년 동안 단층의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지질학적요건, 발전용수의 확보, 인근지역의 조건, 인구밀집지역과의 거리, 방사선측정, 기상관측, 해양과 육상의 생태계감시......

정부의 인허가, 차관의 확보, 차관조건과 운영체제, 각종 절차, 원자로설비, 핵연료, 핵폐기물의 처리..... 주기기 공급계약, 기술용역 계약....., 이로부터 시작되는 원자력발전소의 설계, 제작, 구매, 시공 등, 복잡한 기술과 업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수많은 기술용어, 업무절차, 영어, 영어약어들.......

 

기계기술계장으로 일하면서 바로 옆의 배관부서의 업무도 지켜보았다. 내가 맡았던 업무도 아닌 배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영광 1,2호기 건설공사 도중 자재조달 지연으로 가장 지연되었던 공사가 바로 배관공사 분야였고 이 배관공사의 지연을 만회하기 위하여 건설현장이 가장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영광원자력 1,2호기의 배관길이를 다 합치면 얼마나 될까? 수백 킬로미터는 가볍게 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배관은 바닥이나 벽, 혹은 천장에 설치된 배관지지대로 받쳐지거나 매달려야 한다. 영광 1,2호기에 설치된 배관지지대는 약 8만 5천 개로 집계되었다. 크고 작은 파이프를 받쳐주거나 매달아 놓은 단순해 보이는 철물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모두 설계, 제작, 검사과정을 거친 땀의 결정인 것이다.

 

배관지지대의 역할은 파이프 내부를 흐르는 유체의 상태, 조건, 진동, 열팽창, 그리고 지진발생 등 가상 악조건하에서 배관에 가해지는 외력과 응력을 적절히 완화시킴으로써, 배관이 파괴되거나 파단되지 않도록 배관을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배관의 손상이 방사성물질 유출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배관지지대는 더욱 철저하고 엄격한 요건에 따라, 즉,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배관을 지켜줄 수 있도록 설계, 제작, 설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배관의 자체중량, 유체의 중량, 유체의 흐름조건, 동역학, 응력, 진동, 열팽창과 수축, 가상사고, 지진 발생을 고려한 지진력, 이러한 모든 조건들이 설계의 기초자료가 되며, 공학적 계산식과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하여 응력분석이라는 계산을 거친다.

 

이렇게 파이프라인의 응력이 계산되고 벽체와 같은 구조물, 즉 배관지지대가 붙을 자리에 대한 구조강도 계산이 이루어진 다음 비로소 배관지지대의 설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3,000여종의 부품과 철구조물 중에서 부품과 소재가 선정되고 배관지지대의 구조와 크기가 결정되며, 세부제작도면이 그려지고, 예를 들면 S7-BK-0077-C-H312 식으로 고유번호가 부여된다. 8만 5천 개의 배관지지대가 모두 고유번호로 관리되는 것이다.

 

사용되는 자재도 아무거나 쓰는 게 아니다. 안전등급(Q-Class)으로 분류된 경우는, 사용되는 소재도 엄격한 품질관리체계와 조직 하에서 ASME요건에 따라 제작된 강철 소재만 사용될 수 있으며, 자재에 대한 품질관리기록과 입증서류가 따라야 한다. 국내에서 아무 철재나 사다가 만들 수도 없다. 당시 국내에는 ASME 규격요건을 맞춰 제작할 수 있는 업체도 없었으므로 미국으로부터 자재를 구매하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배관지지대가 설치될 때도 맞춤, 가용접조립, 최종용접과정마다 육안검사, 형광물질침투시험, 방사선투과시험 같은 방법으로 하나하나 검사되고 작업자, 감독자, 검사자의 서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검사기록은 발전소가 준공된 다음에도 'QA Vault'라고 부르는 기록영구보존장소에 영구보존 된다. 배관지지대 뿐이겠는가? 원자로, 터빈발전기 등 안전등급 설비들과 중요설비들의 모든 설계도면, 절차서, 검사기록 등이 QA Vault에 보존되어 향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추적과 확인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품질관리체제가 원자력발전소건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원자력발전소는 서류가 얼마나 많은지 그 종이들을 때서 발전소를 돌리면 1년 치 전기가 나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배관지지대가 이렇게 해서 설치되었다고 모두 끝난 것이 아니다. 실제 발전소 운전조건에서 파이프라인과 배관지지대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안전성이 보장될 수 있는지를 설계자와 시공자 및 품질검사자가 다 함께 현장을 확인하는 배관안전성확인시험(P.V.T : Piping Verification Test)를 하게 된다.

 

배관지지대 8만 5천 개, 그 간격을 4-5m로 잡는다 하여도 약 300Km, 밤낮을 쉬지 않고 걸어도 꼬박 1주일 걸릴 거리, 자동차로 달린다 하여도 세 시간 거리이니, 설계계산서와 도면과, 전산프린트와 검사기록 등 서류는 얼마나 될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인원이 공장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땀을 흘렸을 것인가. 단순하게 보이는 배관지지대 한 분야만도 이러할진대, 토목, 건축, 기계, 전기, 계측제어, 등 가 분야마다 온갖 설비마다에 어린 그 숱한 사연들을 어찌 다 이야기할 수 있으랴. 이러한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한 피땀의 세월들, 경영간부로부터 작업인원에 이르기까지 그 숱한 사람들의 노력들을, 그리고 이 기적과도 같은 기술과 경영의 매카니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그렇다. 원자력 7,8호기, 영광원자력발전소 1,2호기 건설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2조원의 막대한 돈을 투입했다고 순조롭게 진행된 것도 아니다. 건설공사의 착공시기를 전후한 신군부 정부의 국내산업 통폐합과 발전설비일원화 조치의 와중에서 시공계약자 선정부터 지연되었을 뿐만 아니라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사고를 계기로 거세어진 반핵여론, 원자력규제요건의 계속적인 강화는 전 세계적인 원자력산업침체를 불러왔고, 이 바람에 설계가 지연되고, 해외 제작공장의 잇단 가동정지와 종업원 해고사태로 기자재조달이 지연되는 등 여건악화로 1984년에는 건설공정지연 약 6개월, 배관분야의 경우는 무려 1년의 공정지연이 초래되어 드디어는 공정만회가 전혀 불가능할 것으로까지 예상되는 비관적 상황이 되었다.

 

매일같이 시공업체, 국내 제작업체를 독려하고 공정촉진회의를 소집하는 한편, 3개월 간격으로 건설현장에 웨스팅하우스, 벡텔, 주요 국내제작업체들을 소집하여 건설추진회의(Project Review Meeting, PRM)를 개최하는 등, 지연공기만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날이 갈수록 공기지연의 폭은 더 해가서 85년 2월에 예정된 1차계통 상온수압시험, 6월로 예정된 원자로계통, 수압시험 등, 계획공정달성은 영영 불가능한 것으로 예상되었다. 해외공급분 기자재의 구매와 공급독려를 담당하고 있는 벡텔사를 연일 질타하고, 텔렉스, 전화를 통하여 계속 제작공장들을 독려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미주공급분 기자재의 공급지연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김J PM은 1984년12월9일, 건설현장의 배관과장 김과장을 데리고 미국방문의 길에 올랐다. 불과 열흘의 출장기간 동안 두 사람은 드넓은 미국대륙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7개의 제작회사들을 방문하여 공장 책임자와 제작 실무자들을 만나 준비해간 자재목록과 도면을 펴놓고 지연조달품목을 설명하고 조기공급 약속을 받아내고는 다시 밤새도록 자동차를 달려 다음 제작회사를 찾아가는 강행군을 하고 파김치, 토끼눈이 되어 돌아왔다. 해외여행이 난생처음이었던 김 과장은 미국여행 소감을 묻는 동료의 질문에 그런 미국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다면서 웃었다.

 

이러한 해외제작사 직접방문을 계기로 태평양 건너 작은 나라의 원자력발전소건설현장의 긴박감을 피부로 느끼지 못 하던 제작사들이 적극적으로 자재를 제작, 선적하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이제 건설현장에서 밀렸던 일과 밀려드는 자재로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현대건설은 ‘돌관작업‘이라는 이름으로 밤낮없이 공사를 밀어붙였고 한전과 현대건설 너, 나 가릴 것 없이 공정만회방안에 부심하였다. 기계 하나, 배관토막 하나, 밸브 하나까지, 도면 한 장, 작업절차서 하나까지 들추면서 왜 작업이 되지 않느냐, 문제가 무엇이냐, 왜 도착되지 않느냐, 왜 빨리 선적하지 못 한다고 하더냐, 대책은 무엇이냐, 캐묻는 끔찍스러운 공정촉진회의가 매일 계속되었고, 건설요원 모두가 자재공급독려, 작업독려에 매달렸다. 아, 회의 때마다 고함지르던 박Y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하루공기 백만 불", 이 말은 건설공정 독려에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무기였다. 공사가 지연되어 발전소 준공일이 늦어지면 하루에 100만 불이 손해가 난다니 우리가 국가와 민족 앞에 그런 죄인이 될 수는 없다는 압박감이 우리의 가슴을 눌러 일 년 내내 하루도 마음 놓고 쉴 수 없게 만드는 채찍이 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미친 한국인들이었다.

 

건설소장은 "현장 졸도입원은 영광"이라는 식으로 건설요원들을 무섭게 몰아붙이고는 어려운 작업이 완료될 때마다 "고맙다.", "업어주고 싶다."고 토닥여주는 강온양동작전을 교묘히(?) 구사하면서 건설요원들을 독려하였고, 출근시간은 7시, 퇴근시간은 8시가 되었으나 이 퇴근시간조차 제대로 지켜지지를 못 하였다. 시간외근무수당? 그런 거 없었다. 한 주일에 몇 시간 이상의 추가근무는 근로기준법 위반이라 하여 아예 인정되지도 않았다. 한전의 공정관리부서가 보따리를 싸가지고 현대건설의 현장사무실로 가서 합쳤고, 한전-현대건설 통합공정실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한전, 현대 가릴 것 없이 작업자들까지도, 가슴에는 "우리는 하나, 목표도 하나" 하는 리본을 달았었다.

 

그러나 아무리 공정이 급박하여도 제일 중요한 것은 품질관리와 원자력안전이었다. 건설비용이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면서도 품질과 안전성은 세계 최고인 원전을 건설하자는 “건설은 값싸게, 품질은 좋게”가 우리의 목표와 과제가 되었다. 조그만 설계와 시공의 불일치까지도 독수리눈으로 잡아내는 무정한(?) 검사요원들이 가차 없이 발행하는 불만족보고서(NCR)를 안고 우리 기술계는 도면과 절차를 검토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데 머리를 싸매어야 했고 공정촉진회의 때마다 ‘그 문제 빨리 해결 안 하고 뭣 하고 있느냐는 호통 속에 애꿎은 수난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하여, 1984년 하반기부터 건설공사는 급속한 진전을 보였고 드디어 시운전반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였고, 발전소의 270여개 계통별로 기계, 전기, 배관, 배관지지대, 계기 등, 모든 설비들을 꼼꼼히 챙기고, 그리하여 계통을 하나하나 구성하고 완결지어, 건설기록, 시공기록, 검사기록, 도면 등과 함께 시운전반에 인계하는 건설마감추진반이 가동되었고, 85년 2월, 7호기 2차계통 수압시험이 성공적으로 완료됨에 따라 건설공정을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건설요원들은 힘든 과정들을 넘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오냐, 해보자. 저 앞에 보이는 고온기능시험까지만 고생하면 한결 수월해지겠지."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꿈이었고, 그 고생과 힘든 일은 수압시험, 고온기능 시험, 핵연료장전 등, 프로젝트의 절대공기 이정표를 따라, 계속되는 독려 속에서, 또 건설마감, 수정작업, 설비개선작업, 계약종결, 자재정산 등, 온갖 업무를 통하여 준공될 때까지도 끝날 줄을 몰랐다.

 

나는 준공이 끝날 때까지도 거기 있었다.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내거나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일은 우리에게 사치였고 꿈이었다. 나뿐 아니었다. 나와 같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때 그 곳에서 청춘을 바쳤다. 이 글은 내가 남겨두었던 기록과 또 기억에 의존하여 쓴 것이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