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광 3,4호기, 울진 3,4호기

60. 원자력기술자립의 신호탄, 영광 3,4호기

Thomas Lee 2022. 11. 30. 17:31

1987년 영광 1,2호기가 모두 준공되고,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하여 준공식이 거행되고,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고, 가마미 해수욕장 시위대가 발전소와 건설사무소에 쳐들어오고, 그리하여 가마미 마을이 74억원이라는 보상을 받아가고, 주변마을들이 들썩거리고, 그러는 사이에 해는 바뀌어 1988년이 되었다. 그리고 5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일 해온 나도 1988년 3월엔가 본사 원자력건설처로 발령받아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본사발령을 받은 나는 우리 포니엑셀 승용차에다 간단한 짐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 회사에서 가까운 청담동에 하숙집을 정해놓고 원자력건설처에 출근하기 시작하였다. 가족을 데리고 이사할 집을 정할 때까지 하숙생 홀아비, 주말부부가 된 셈이었다. 몇 주 동안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출근하고 토요일 오후에 차를 몰고 영광 홍농 사택으로 내려갔다가 월요일 새벽에 출발하여 다시 서울로 올라와 출근하는 생활을 하였다. 홍농 사택에서 지름길을 택하여 사택 남쪽 뒤편으로 농로 비슷한 좁은 길을 따라 요리조리 달려 고창을 거쳐 정읍으로 간 다음 거기서부터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서울과 홍농을 오가는 데 편도로 꼬박 네 시간 가량 걸렸던 것 같다.

 

그 무렵 온 나라는 올림픽을 앞두고 다소 들떠 있었고 어느 날 나는 차 라디오에서 한국의 자동차가 100만대를 돌파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홍농사택에서 월요일 새벽에 출발하여 네 시간 가량 달려 아침 출근시간에 서울에 도착하여 경부고속도로로부터 양재대로를 지나고 영동대로로 접어들면 시꺼먼 스모그 속으로 저만치 무역센터가 보였고 날이 맑은 아침이면 무역센터 앞으로 멀리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까지 보였다.

 

그러는 동안 홍농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가마미 마을만 74억원이나 보상해 주고 우리는 아무것도 없느냐고 빡친 홍농읍 주민들과 성산리 주민들이 사택정문을 봉쇄하고 직원들의 출근을 막았다. 직원들에게 오물과 김치국물을 뿌렸고 한 직원을 붙잡아 트럭짐칸에 감금하고 린치를 가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삼성동 한전본사 마당과 화단에 천막을 치고 모닥불을 피우고 유리창에 돌을 던져 깨뜨렸고 김광호씨인가로 이름이 기억나는 직원이 그 유리파편에 맞아 콧등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우리 가족이 어디로 이사하느냐는 것도 고민꺼리였다. 영광으로 내려가기 전에 분양받은 고덕동 18평형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전세 입주자를 내보내고 그리로 입주하느냐, 아니면 회사 가까운 곳에 전세 아파트를 구하느냐를 놓고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삼성동 AID 15평 아파트에 전세로 입주하기로 하였다. 경기도 하남시와의 경계에 있는 고덕동이 회사에서 너무 멀기도 하였지만 아이들에게도 고덕동 보다는 삼성동이 나을 것 같다는 친지의 권고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1988년 5월인가에 홍농을 떠나 서울 삼성동 AID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아들과 딸은 언주초등학교로 전학하였고 우리 가족은 이렇게 이사한 삼성동 AID 15평 아파트에서 5년을 살게 된다.

 

그 동안 서울에서는 박정기 사장님이 건설을 추진한 한전사옥이 정부의 은근한 시기질투와 훼방을 이기고 1986년엔가 무역센터 건너편 삼성동 167번지의 드넓은 부지에 20층 건물이 4층 부속건물과 식당과 강당건물을 거느리고 우뚝 들어섰다. 오랫동안 이리저리 전세방살이로 떠돌던 한국전력이 드디어 드넓은 주차장에다 온실, 테니스코트까지 갖추고, 소나무, 향나무, 대나무로 조성한 아담한 동산에 ‘한전인상’이라는 청동조각상까지 세운 조경, 배기구를 활용한 탑과 분수대까지 갖춘 멋진 사옥에 입주함으로써 ‘내집마련’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1987년엔가 영광 3,4호기 건설공사 계약이 체결되었고 그 해 7월엔가 박정기 사장님은 사직을 하고 회사를 떠나셨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전두환 군사정부가 “너희들 싸우지 말고 한전 사장, 한중 사장 바꿔서 해 봐.” 해서 성낙정 한전사장이 한중사장으로 가고 박정기 한중사장이 한전사장으로 온 것이 1983년 3월인가 그랬는데, 그렇게 한전사장으로 부임한 박정기 사장님이 1987년 7월 한국전력을 떠날 때까지 4년 반 가량 재임하던 기간 중 이룬 최대업적 두 가지는 한전본사건물을 건설, ‘내집마련’을 한 것과 영광 3,4호기를 국내업체 주계약자, 해외업체 하청계약자로 계약체결하여 원자력기술자립을 추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기술도 없는 국내업체들을 주계약자로 하고 쟁쟁한 해외업체들을 하청계약자로 만들어 기술이전을 하면서 건설하도록 한 영광 3,4호기는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그야말로 기네스북에 올라가야 할 희귀한 일대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일개 과장이었던 내가 높은 하늘을 나는 봉황의 뜻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마는 영광 3,4호기 주기기 계약 기술업무를 담당하면서도 영 못마땅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이 무리한 계약과 원자력기술자립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실무자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반발과 문제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무리한 원자력기술자립을 박정기 사장님이 추진해서 이루어낸 것이었다.

 

만일 우리 대한민국이 그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같은 회사들로부터 원자로와 터빈발전기를 사오고 미국의 기술에 의존하여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왔더라면 원자력기술자립이나 한국형원자로는 없었을 것이다. 또 에너지자원 빈국인 우리나라가 원자력에 눈을 돌리지 못 하고 타성적으로 석탄과 석유, 가스발전에만 의존해 왔다면 우리나라의 수출경쟁력과 경제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석탄, 석유, 가스 발전소를 우리 기술, 우리 힘으로 100%를 건설한다 해도 그 연료인 석탄과 석유, 가스를 수입해야 하니 에너지 해외의존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는 다르다. 원자력발전소의 연료는 우라늄이므로 연료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 발전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건설비용이다. 그러므로 원자력발전소를 우리 손으로 건설한다면 그만큼 에너지국산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자력기술자립은 당시 매우 중요한 국가시책이 되었던 것이다.

 

박정기 사장님이 추진한 국내업체 주계약자 방식의 영광 3,4호기 계약은 1979년 미국에서 일어난 드리마일 원전사고 후 침체되어 Buyer's Market이 되어 있던 당시 세계원자력 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기회에 원자력기술자립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밀어붙인 과감한 시도였고 모험이었다. 한전은 원자력 11, 12호기 추진반을 만들어서 기술도 없는 한국중공업과 국내업체들을 주계약자로 정해놓고 1985년말 쯤엔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제너럴일렉트릭, 캐나다원자력공사(AECL), 영국의 GEC, 프랑스의 알스톰, 일본의 히타치, 그리고 스위스와 독일의 원전업체에까지 쟁쟁한 세계적 기업들에게 입찰안내서(ITB)를 보내어 하청계약자가 되라고 초청하였다. 또 아직 기술이 부족한, 아니, 없다시피 한 한국전력기술(주)와 원자력연구소를 발전소 설계와 원자로계통설계의 주계약자로 세워놓고 미국의 벡텔, 싸전트 앤 런디, 스톤 앤 웹스터, 길버트, 프랑스의 EDF, 캐나다원자력공사, 독일의 원전건설업체에게까지 ITB를 보내 한국전력기술(주)의 하청계약자로 참여하라고 초청하였다. 그들로서는 참으로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입찰안내에도 당시 세계적 원자력침체로 일감이 없어 빈사상태에 빠져 있던 해외업체들은 마지못해 입찰에 응하였고 반 년 동안 실무팀의 평가작업을 거쳐 86년 가을쯤엔가 최종적으로 낙찰자가 정해졌다. 웨스팅하우스나 벡텔 같은 회사들은 “한전이 별 수 있겠느냐, 결국 자신들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라는 오만과 자신감이었는지 모르지만 기술을 못 넘겨주겠다고 해서 탈락되었다고 들었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한전이 달라는 대로 기술을 가르쳐주고 넘겨주겠다는 컴버스천엔지니어링과 제너럴일렉트릭, 그리고 싸전트 앤 런디사가 하청계약자로 선정되었다. 실질적으로는 해외하청계약자가 모든 일을 책임지고 경험 없는 국내주계약자들을 가르쳐 주고 기술 넘겨주고 도면, 기술자료, 전산코드 등도 줘가면서 원전을 건설하는 희한한 계약이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각 계약의 계약서도 한글과 영문으로 작성되었다. 한글과 영문계약서의 뜻이 상충되거나 모호할 때는 한글계약서가 우선되도록 하고 이렇게도 해결되지 않을 때는 한전의 해석에 따르고 그래도 이견이 해소되지 않을 때는 한국의 법원에 이의제기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해외업체들에게는 그야말로 어처구니 정도가 아니라 굴욕적이었다고 할 만 한 일이었다.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해외업체들만이 아니었다. 나 같은 실무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영광 3,4호기 건설공사비가 너무 비싸졌다. 세계적인 원자력침체로 한전이 얼마든지 값싸게 유리하게 영광 3,4호기를 건설할 수 있었을 텐데 기술자립하느라 오히려 훨씬 비싸게 원전을 건설해야 하게 된 것이었다. 또 기술자립의 이득을 보는 것은 한전이 아니라 한국중공업과 한국전력기술(주), 그리고 원자력연구소 같은 다른 회사들이라는 점이었다. 국내업체들의 재산이 될 기술자립을 위하여 한전이 돈을 써야 하는, 그야말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다. 이건 예산회계법이라는 국가의 법률을 위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국내업체들의 기술자립은 국내업체들이 스스로 하든지 국가가 지원하든지 해야지 왜 한전이 돈을 대주면서 시켜주어야 하느냐 말이다. 전 같았으면 한전직원들이 해외훈련을 갔겠지만 이번에는 한국중공업과 한국전력기술(주), 그리고 원자력연구소가 수십 명씩, 수백 명씩 몇 달씩, 일 년씩, 이 년씩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과 제너럴 일렉트릭, 그리고 싸전트 앤 런디사로 훈련생들을 보냈다. 그리고 돈은 한전이 내야 했다. 한전의 실무진들로서는 그야말로 배가 아프고 부아가 나고 열불이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 발전소종합설계와 원자로설비계통설계 계약자가 선정된 다음 시공계약자를 선정할 때 일이 터졌다. 국내에 시공기술을 갖추고 ASME Stamp를 보유한 자격업체는 고리 1호기 때부터 웨스팅하우스의 하청업체가 되어 현장시공을 하고 고리 3,4호기와 영광 1,2호기의 시공계약자가 되어 원전 현장건설공사를 해온 현대건설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경쟁입찰의 구색을 맞추느라 해외의 시공업체들을 불러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전은 할 수 없이 현대건설과 수의계약으로 영광 3,4호기의 시공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안 그래도 한전이 마음대로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의 해외 하청계약자들을 선정하여 막대한 리베이트를 받았다더라 하는 소문인지 의혹인지가 있던 차에 또 현대건설과 수의계약을 했다는 소리에 분노가 폭발하였는지 “현대건설과의 수의계약을 취소하라.”는 고위층의 지시가 떨어졌다. 입찰에서 탈락한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프랑스의 프라마톰 같은 회사들이 정부에 불만을 터뜨리고 리베이트설을 흘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자 박정기 사장님은 ‘이제 내 할 일은 끝났다“는 것처럼 ”큰 산을 넘는 바람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이임사를 남기고 미련 없이 사장 자리를 버리고 나가버렸다. 1987년 7월인가 그랬다. 현대건설의 계약은 취소되었으나 후임사장으로 온 한봉수 사장도 별 수 없이 다시 현대건설과 수의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 편에서는 88올림픽이 준비되던 그 어수선한 그 때 나는 다시 본사 원자력건설처로 돌아오게 되었고 내가 근무하게 된 부서는 바로 영광 3,4호기의 그 어수선한 한 복판, 즉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를 담당하는 기술1부였고 부장은 훗날 한수원 사장이 된 이중재 부장님이었고 원자력건설처장은 허숙 처장님었다. 그리고 영광 3,4호기의 계약자 선정의혹을 둘러싸고 국회의 감사,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고, “짜집기 설계”라는 기가 막히는 언어가 등장하였다.

 

기술과 경험도 없으면서 수백 톤짜리 용해로와 만 톤짜리 프레스 등 세계최대규모의 주.단조설비를 활용하여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한국중공업은 기술부족과 미숙으로 숱한 문제들을 만들어내었고, 나는 다른 또 한 사람의 과장과 함께 매달 창원 한국중공업을 방문하여 제작상황을 점검하고 독려하는 업무를 3년 동안 수행하게 된다.

 

원자로설비와 터빈발전기 제작과정에서 발생한 숱한 문제들과 창원 금속노조파업, 아랍에미레이트 제벨알리 담수발전설비와 사우디아라비아 아씨르 시멘트공장 수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자본잠식상태가 되어 한중민영화 매각이 거론되었던 일들은 이미 앞서 “한국중공업 이야기”에서 이야기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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