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광 1,2호기 건설현장

47. 십자가 네 개, 10월 10일 10시 10분

Thomas Lee 2022. 8. 3. 06:48

내가 쌍문동 연수원에 초급간부교육을 받기 위하여 입소한 것은 1983년 8월 하순이었다.

잊을 수 없는 일이 그 때 일어났다. 바로 9월 1일에 전해진 KAL 007기 격추사건이다.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그 날 아침 전해진 엄청난 뉴스는 그야말로 끔찍하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소련공군기의 미사일에 맞아 269명의 목숨이 한꺼번에 국화꽃잎처럼 산산이 부서져 사할린 검은 바다에 떨어진 사건...... 아무리 공산당 유물사관으로 인간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저들이라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밤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미사일로 피격되던 그 순간, 그 미사일은 비행기의 어느 부분에 맞았을까? 미사일이 폭발한 순간 그 자리와 그 근방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행기는 동강이 났을까, 큰 구멍이 난 채 추락하였을까, 산산이 부서졌을까? 모든 것이 폭음과 함께 부서지고 또 고공에서 비행기 안팎 기압차이로 인하여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으로 휩쓸려나가 흩어지지 않았을까?

 

그들은 이제 곧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할 생각을 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가, 혹은 몸을 뒤척이다가, 혹은 음악을 듣다가 그 변을 당했을까? 1만 피트 고공에서, 영하 40도의 차가운 공중에 피투성이 조각으로 내뿌려져 꽃잎처럼 바다 위로 떨어졌을 영혼들......

그 뒤로도 나는 내 자신이 까마득히 높은 차가운 밤하늘에서 어두운 바다를 향하여 떨어지는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몸을 떨었다.

 

비행기가 떨어졌음직한 해역에는 소련과 미국의 군함들이 출동하여 수색을 벌리고,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는 간 곳이 없고 희생자들의 시신들도 찾을 수 없고, 얼마 후 일본의 해안에 사지와 머리가 잘려져 나간 여인의 몸뚱이가 파도에 밀려나왔던 그 참혹한 사건....

사할린 바다를 찾아간 유족들은 바다를 향하여 오열하고 떠나간 이들을 목 놓아 부르며 꽃다발을 던져 보지만 매정스럽게 뱃전을 때리는 찬바람은 그 통곡소리조차 휩쓸어가 버리고 던진 꽃다발은 바람에 밀려 되돌아와 뱃머리 물결에 부딪던 그 모습.....

그 허무하고도 안타까운 장면들을 보던 그 기억.....

 

그런데, 269라는 희생자의 숫자......., 대한민국은 그 때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게임을 유치해놓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과 88 올림픽 게임이 성공하면 세계 속의 한국이 된다고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3년 뒤인 1986년 서울 잠실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 때 금메달 숫자가 왜 하필이면 269 개였을까? 왜 그 희생자 수와 같은 숫자였냐 말이다.

그 269 개의 금메달 중 150 개 이상을 죽의 장막을 헤치고 서울로 기어 나온 중공이 쓸어가고, 우리 대한민국은 90 개가 넘는 금메달을 따서 일본을 이겼다고 난리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은행에서 하필이면 번호표 269번을 받아들고 멀거나 그 숫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269라.......”

 

되돌아가서... 나는 연수원에서, 1주간인가 2주간인가 기억도 안 난다, 교육을 마치고 9월 하순, 가족을 이끌고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으로 내려갔다. 건설현장은 영광군 홍농면 계마리 517번지에 있었고 사택은 약 3 킬로미터 떨어진 홍농면 상하리 야트막한 골짜기에 있었다.

발전소와 사택을 짓기 위한 정지작업과 굴토작업을 하면서 6.25 전쟁 때 서로 죽이고 죽임 당한 참혹한 살육의 희생자 유골들을 1천 구 넘게 수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6.25 때 영광에서는 유난히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상잔이 벌어졌단다. 우리 가족이 입주하여 살게 된 직원 아파트는 수많은 유골들이 나온 그 살육의 골짜기에 지어졌던 것이다.

 

나중에 영광 1,2호기로 이름이 바뀌고 지금은 한빛원자력이라고 불리지만 그 당시는 원자력 7,8호기라고 불렀다. 영광건설사무소 소장님은 이WB씨였는데 나는 기계과 기술계장으로 임명받았다. 이미 기술계장이 있었는데도 그 기술계장을 다른 부서로 보내고 나를 그 자리에 앉힌 것이었다. 아리조나에서 현장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서먹하고 업무도 익숙지 않을 때였는데 큰 사고가 터졌다.

 

기술계장으로 발령 받은 지 한 주일인가 두 주일도 되지 않은 1983년 10월 9일, 한글날이자 일요일, 그 날은 종일 비가 추적거리며 내렸고 나는, 나 뿐 아니라 직원들 거의 모두가, 나가지 않고 사택 방안에서 하루 종일 뒹굴었다. 일요일도 휴일도 없는 건설현장이지만 비가 내리면 철골용접이고, 페인팅이고, 목공작업이고, 콘크리트 타설이고 뭐고 작업이 거의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버마에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갔던 17명의 각료가 아웅산 묘소에서 한꺼번에 폭사하는 참혹한 테러사건이 터졌고 그 뉴스는 집에서 쉬던 우리를 놀라게 했다. 피 묻은 흑백필름에 그들이 남긴 마지막 모습, TV는 폭음과 함께 흩날리는 나뭇조각과 먼지, 아우성,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묘소건물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3명의 북한군 공작원들 중 두 명이 사살되고 한 명이 생포되었다던가, 한 명이 사살되고 두 명이 생포되었다던가 그랬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10월 10일 월요일 아침, 우리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다시 건설현장에 출근하였다.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에 빛나는 태양이 다시 솟아올랐고 건설현장을 내려다보고 우뚝 선 금정산 봉우리에는 한 줄기 옅은 아침안개가 휘감겼다가 사라졌다. 건설현장은 드디어 2호기 원자로 격납건물의 꼭대기부분의 철판, 즉 Upper Dome Liner Plate를 설치하는 작업을 예정대로 시작하였다.

 

현대건설이 보유한 최대 600톤을 들어올릴 수 있다는 초대형 링거크레인은 대지를 딛고 높이 100미터가 넘는 Boom을 쳐들었고 로프를 내려 지름 36M, 무게 178톤이나 되는 거대한 삿갓모양의 철판, 2호기 격납건물 상부를 덮을 돔 철판을 고리로 감아 걸었고, 그리고 고사가 치러졌다. 웃는 모양의 삶은 돼지 대가리를 놓고 현대건설소장, 작업반장들, 그리고 몇몇 한전 간부들이 배춧잎 만 원짜리 지폐를 돼지의 입에 물려놓고 두 번 씩 절하고, 그렇게 고사가 끝나자 작업반 노무자들이 달려들어 만 원짜리 지폐를 머금은 돼지대가리를 낚아채어 도망가고 또 한 몇 노무자들이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뒤쫓아 가고...

 

그런 가운데 600톤 링거크레인은 우렁찬 엔진음 소리를 내며 상부돔 철판을 서서히 격납건물 위로 들어 올렸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애써 조립한 돔 철판이 격납건물 꼭대기를 덮으면 격납건물도 제 모양을 갖추고 그 위에다 철근을 조립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하면 격납건물은 완성될 것이고, 고리원자력에서부터 숱한 중량물을 들어주었던 600톤 링거크레인도 은퇴를 할 참이었다.

그 시각이 10월 10일, 10시 10분경이었다, 10자 네 개가 겹쳐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다 올라갔다 싶었던 돔 철판이 기우뚱거리더니 크레인의 Boom이 조금씩 슬로비디오처럼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니 왜 저러지? 저럴 수가, 저럴 수가....!”

나는 그 때 크레인 바로 곁에 서 있었는데 크레인의 Boom이 천천히 기울어지는 걸 보면서 잠시 동안은 내가 거대한 격납건물 콘크리트 구조물과 크레인을 위로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 때문에 생긴 착시현상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거대한 크레인 붐이 진짜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순간, Boom은 “뚝! 뚜두둑....” 굉음을 내면서 중간쯤에서 허리가 꺾였고 돔 철판은 격납건물 위에 떨어진 다음 “와르르....” 천둥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거대한 크레인 Boom이 넘어져 터빈건물을 덮치면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수한 쇠막대기들을 막대기나 수수깡처럼 흩뿌렸고 터빈건물의 철골구조물들이 그 충격에 힘없이 휘어져 나갔다.

사람들은 ‘어, 어...“ 소리도 못 내고 넋이 빠졌다. 발전소가 모두 무너지는 게 아닌가, 여태 애써 해놓은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물거품처럼 끝나는 게 아닌가 싶은 무섭고 참담한 심정에 사람들은 몸조차 가누지 못 할 지경이었다.

 

얼마 뒤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상부 돔 철판은 격납건물 위에 비스듬히 걸려 멈춰 있었고,

크레인 Boom은 와이어로프를 매단 채 터빈건물철골 위로 처참하게 잔해를 눕히고 있었다. 아우성과 고함 속에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을 앰뷸런스에 실어 보내고 이리저리 뛰던 그 순간. 온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되던 잊을 수 없는 그 시간! 이 사고는 한전, 아니 세계의 원자력건설사상 아마도 최대의 사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큰 사고가 내가 부임하자마자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도 상부돔 안쪽에 붙어있던 배관행거 두 개가 하부돔 철판에 걸려서 178톤의 중량물을 멈추게 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철판이 계속 미끄러져서 떨어졌다면 아마도 그야말로 건설현장 절반쯤은 부서지고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을지도 모른다. 178톤짜리 그 거대한 돔 철판이 격납건물 위에서 마치 솥뚜껑처럼 미끄러져 내릴 때 철판은 종잇장처럼 찢겨지고 돔철판 안쪽에 부착, 설치해 놓은 살수(Emergency Spray) 배관들은 마찰열로 뻘겋게 달아오르고, 떨어져 나온 쇳조각이 튕겨 나가던 그 속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날 터였는데, 그 철판이 얼마간 미끄러져 내리다가 걸려서 멈춘 것이었다. 그리고 건너편 터빈건물에서 일하던 인부 두 사람이 날아온 쇠토막에 맞아 사망하고 십 여 명이 다치는데 그친 것은 사고규모에 비하여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볼 때 사고의 원인은 바로 전 날, 아웅산 사건의 날 그렇게 종일토록 추적거리고 내린 비였다. 책임문제로 토목기술자들은 아니라고 끝까지 우겼지만 그 빗물이 크레인이 선 자리, 팠다가 되메운 그 자리의 지반을 적셨기 때문에 지반이 크레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꺼졌던 것이다. 그 사고를 수습하는데 8개월이나 걸렸다. 수 십, 수백 장의 도면과 작업절차서, 텔렉스, 전화, 공급독려, 엄동설한 속에서도 계속된 철판복구작업....,

 

내게 사고책임은 없었지만 사고복구와 관련된 기술업무는 나의 업무가 되었다. 원래 격납건물을 짓는 공사는 토목업무에 속하고 그 내벽에 붙이는 철판작업 역시 토목(Civil)공사에 포함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떻게 된 건지 토목쟁이들이 “우리는 토(土), 목(木), 흙과 나무, 땅 파고 다리 놓고 콘크리트 붓는 거 밖에 할 줄 모릅니다. 철판작업은 용접을 해야 하는데 토목쟁이가 무슨 용접을 합니까?” 그래서 철판조립작업은 기계부서의 업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불도저로 밀어서 덤프트럭으로 옮기고 철근조립 하고 콘크리트 타설하는 단순하고 쉽지만 돈은 제일 많이 만지는 부서가 어딜 가든지 토목 마피아(?)들이었던 셈이다.

 

이 사고만 해도 그랬다. 팠다가 되메운 지반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 하고 그 위에 크레인을 앉힌 토목부서의 책임이었지만 한사코 크레인 Boom의 각도와 철판의 중량이 허용치를 넘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건설소장님이 토목쟁이였다.

 

아무튼 건설현장에는 긴급사고대책반이 특별히 구성되고, 공정복구계획이 검토되고, 과기처, 원자력안전센터, 원자력 자문위원드로 구성된 대규모 조사단이 내려와 현장을 조사하고, 철판, 배관 자재가 긴급발주 되고, 밤을 새우는 대책회의가 이어지던 몇 날 몇 주일이 우리에겐 악몽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8개월 뒤인 1984년 6월초, 다시 만들어진 상부돔 철판이 다시 고쳐진 바로 그 사고 크레인에 다시 들려져서 8호기 격납건물 위 제자리에 올려 지던 날은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88년까지 5년 동안 영광원자력건설현장에서 기계기술계장으로 도면, 기술지침, 시방서, 보고서를 끌어안고 일하면서 겪은 사건, 사고, 에피소드도 많지만 그 크레인 사고처럼 엄청난 사고는 없었다.

 

10월 10일, 아침 10시 10분에 일어난 그 사고......

10월 10일이 되면 쌍십절(雙十節)이라고 거창하게 행사하는 나라도 있는데.....

 

아, 그리고 하고 싶은 말 하나 더 있다. 그 때 과기처 원자력안전센터의 박사님들 한심스러웠다. 격납건물 철판은 두께 6 밀리미터의 얇은 연강 철판이며 그 역할은 비상시 방사능 물질을 밖으로 유출시키지 않는 벽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똑똑한 박사님들은 무슨 대단한 벼슬을 하는 것처럼 현장에 내려와 철판을 살펴보고 그 철판이 큰 충격을 받았으니 철판 내부에 보이지 않는 금이 생겼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이것이 발전소 운전중에 점점 성장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면서 철판의 멀쩡한 부분까지 잘라내고 다시 제작하도록 요구하였다. 유리도 아니고 하중을 받는 것도 아닌 연강철판을 놓고 무슨 그런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전은 그러나 그 박사님들이 내리시는 분부를 받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박사님들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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